불교상식/교리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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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發願)이란?

관리자 | 2006.06.10 02:44 | 조회 892
발원 (發願)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하여 갖는 의문 가운데 하나는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욕심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봄직한 의문입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상대방을 짓누르기보다는 무조건 양보하고 욕심을 내지 않으려 하다가는, 얼마 안가 도태되고 말 것이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심지어 일부 불자들이 무기력해 보이며, 세상에 대하여 염세적이고 피동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이러한 불교 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발원(發願)을 수행의 첫걸음으로 삼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원(願)을 발(發)한다는 것,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욕심과는 다릅니다. 욕심과 발원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욕심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램이지만, 발원은 공통적 바램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인류 전체,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와 남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며, 남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둘째,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발원은 능동적인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발원은 애당초 없는 것을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꿈에도 남에게 주고자하는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부러 원을 발하여 자꾸 베푸는 마음을 연습함으로써, 아상(我相)의 소멸에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발원은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합니다. 한마디로, 발원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愎?것입니다. 욕심은 미래에 중점이 두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 달성을 위해서 때로는 현재를 희생할 것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발원은 현재에 중점이 두어져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가 세운 원을 달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기는 하지만,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노력하는 자체가 즐거운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보건대, 발원은 참다운 자기전환의 시작이라 말 할수 있습니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인 것입니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의 지은 바 업에 이끌려 살다 가는 것입니다. 원생이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나가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방향을 설정해서 과거의 업을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생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발원이 필요합니다. 걸림만 없다면 무엇이든 마음에 그리는 대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걸림이 있기 때문에, 즉 '못한다' 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의욕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원을 세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초심자에게는 반드시 발원이 필요합니다. 발원이란 탐·진·치 라는 속성에너지의 방향전환입니다. 그것은 욕심을 완전히 부정하여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욕심을 일단 인정하되 다만 방향을 바꾸어 도심(道心)으로 인도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탐·진·치의 대전환에 다름 아닙니다. 탐심을 돌이켜 대신 심으로, 진심을 돌이켜 대분심으로, 치심을 돌이켜 대의심으로 만들어 수행의 방해물을 오히려 수행의 자량으로 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번뇌가 곧 보리하고 하는 대승불교의 진수입니다. 돌은 그저 돌일 뿐입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요, 딛고 넘어가면 디딤돌이 됩니다. 이것은 존재의 속성인 탐·진·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여 이에 역류하고자 인위적 노력을 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에너지, 즉 끊임없는 향상성들을 오히려 도를 깨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이 발원의 참된 가치입니다. 그러면 실제 발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 발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사홍서원이 있습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衆生無邊 誓願度)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煩惱無盡 誓願斷)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法門無量 誓願學)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佛道無上 誓願成) 이 사홍서원은 대승보살들이 보리 성취(上求菩堤)와 중생구제(下北衆生)를 위한 보편적인 실천덕목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보살이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3아승지겁의 수행이 필요한데 그 동안에 모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완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때뿐인 결심으로는 이것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리심을 일킨 보살은 어떠한 곤란에도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결의를 일으켜야 합니다. 이 결의가 바로 서원입니다. 그리고 이타행을 통해 무량 무수의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제도하면서도 누구를 제도한다거나 누가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무런 공덕도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서원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의 서원은 어떤 공격도 물이칠 수 있는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이 견고하다 하여 '큰 서원(弘誓)의 갑옷(大鎧)을 입는다'(僧那僧涅 大誓莊嚴) 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서원은 발원이 바로 업에 이끌려 사는 삶, 남의 짐이 되는 삶에서 스스로 창조해가는 삶, 남의 짐을 덜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을 잘 표현해 줍니다. 결국 사홍서원이란 자신의 업력을 이겨내는 원력을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낮추고 일체의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여야 합니다. 밖의 중생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속의 중생도 공경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공경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모두 함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서원은 클수록 좋겠지만, 가급적이면 자신의 현재 상황과 부합하는 것으로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예컨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할 경우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다 깨달음을 얻어지이다.' 하고,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병고에서 벗어나 지이다.' 하며, 마음 편안함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다 마음이 편안하여 지이다' 하는 식으로 발원해나가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내가 어서 깨쳐서 중생들을 제도하겠습니다.' 해야 할 것 같지만, 여기에는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 그리고 제도한다는 생각과 제도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깨친 이의 특징이 이러한 네 가지 상(相)의 소멸이라고 怒愎? 내가 수행해서 내가 깨치고 제도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네 가지 상이 증장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특별한 바램이 없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는 것도 좋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이 밝고 건강해져서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은 성취해서 부처님 시봉 잘 하길 발원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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