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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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종교인가 ?

관리자 | 2006.06.10 02:32 | 조회 947
불교는 스스로를 구제하는 철학적 종교
불교는 흔히 세계 3대 종교 또는 세계 5대 종교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불교는 종교의 세 요소인 교주, 교리, 교단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체계와 종교적 의식, 그리고 종교적 표상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붓다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점에서, 또한 붓다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보다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불교는 과연 종교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근본적으로 ‘종교’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1912년 류바(Leuba)가 48종의 종교 정의를 수집한 것을 예거하지 않더라도 종교에 대한 정의는 실로 다양하다. 그래서 베버는 “종교의 정의는 종교에 대한 연구가 모두 끝났을 때에만 가능하다.”라고 했을 것이다. 이처럼 종교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게 규정지지 않는 한, 이론적으로 ‘불교는 종교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불가능하게 된다.


싯달타 ‘죽음’해결하려고 출가

연기의 진리 깨닫고 열반 얻어



그러나 많은 종교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종교의 기본 요건은 ‘인간 구제 또는 구원에 대한 궁극적 관심과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한마디로 죽음에 대한 붓다의 궁극적 관심에서 출발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여래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잡아함경〉의 말씀과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지저분함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였다.”라는 〈중아함경〉의 말씀 등에 잘 드러난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에 대한 붓다의 인식은 참으로 철저했던 것 같다. 그것은 〈불설비유경〉의 매우 뜻깊고 중요한 다음 비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주 먼 옛날, 어떤 사람이 광야를 거닐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나운 코끼리가 나타나 그를 공격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치다가 마른 우물 속에 간신히 몸을 피했다. 우물곁의 큰 등나무 뿌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는데 바닥을 보니 독룡(毒龍)이 입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깜짝 놀라 나무 뿌리에 매달려 우물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에서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대며 노려보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그가 이번에는 위를 쳐다보니 자기가 매달려 있는 나무 뿌리를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면서 갉아먹고 있고, 먹이를 놓친 코끼리는 더욱 성을 내고 있었다. 벌판을 휩쓰는 맹렬한 들불은 등나무를 태우고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흩어져 내려와 그의 온 몸을 쏘아댔다. 그런데 그 때 나무에서 뭔가가 떨어져 그의 입 속으로 흘러들었다. 맛을 보니 달콤한 꿀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처한 극한 상황도 잊어버린 채 다섯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꿀을 받아먹는 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부처님이 사위국(舍衛國)의 승광왕에게 설한 비유로서, 생사의 위험과 고통을 망각한 채 오욕락을 좇는 미혹한 중생들의 삶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광야는 생사윤회의 무명의 긴 밤을,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중생을,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우물은 생사(生死)를, 나무뿌리는 수명 또는 명줄을, 독룡은 죽음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네 마리의 독사는 땅.물.불.바람 사대(四大)를,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즉 세월을, 들불은 늙음과 병듦을, 벌은 그릇된 생각을, 다섯 방울의 꿀은 오욕락을 각각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실존적 한계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고타마 싯달타는 부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자의 지위와 꽃다운 사랑을 버리고 뼈를 깎는 출가수행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불교는 종종 현실도피주의나 허무주의로 곡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붓다는 그 피나는 고행의 결과, 모든 사물과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제법실상)을 깨닫고 모든 고통과 번뇌를, 심지어 죽음까지도 극복하게 된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깨달은 후 “나는 이제 영원한 생명[不死]을 얻었노라. 나는 모든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났노라”라고 한 붓다의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붓다의 깨달음이 어떤 절대자나 신의 도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붓다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불교는 어떤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진리의 자각을 통한 인간구제를 주장한다. 불교의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인 연기법의 근본의미는 상호의존성이라는 철학적 진리가 아니라,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의 모든 괴로움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이므로 그 원인과 조건을 깨달아 제거하면 모든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알려주는 종교적 진리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괴로움의 자각을 통한 괴로움의 극복,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까지를 가르치는 불교는 인간 스스로에 의한 인간구제를 설하는 독특한 철학적 종교요 희망의 종교라고 할 것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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