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시대사적 불교의 전파(4)

관리자 | 2006.08.17 08:14 | 조회 937
조선시대의 불교 고려말부터 거세게 일기 시작한 배불(排佛)의 기세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층 거세졌다. 태조는 조구(祖丘)를 국사에, 자초(自超)를 왕사에 임명하고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승려의 증가를 막기 위해 도첩제를 엄격하게 행하였다. 태종은 배불정책을 과감하게 단행하여 궁중의 불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242개의 사찰만 남겨두고 그 이외의 사찰을 모두 폐지하였으며 동시에 거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또 왕사와 국사제도를 폐지하고 11종의 종단을 7종으로 축소시켰다. 세종 은 다시 7종을 통폐합하여 선교양종으로 하였고, 승록사를 폐지하고 흥천사를 선종의 본사로, 흥덕사를 교종의 본사로 하였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이에 불교는 활기를 띠는 뜻했으나 성종, 연산군, 중종 등의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명종 때에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고승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선교양종을 부활시켜 선종의 본사를 봉은사로, 교종의 본사를 봉선사로 하고, 승과제도를 다시 시행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 이후 탄압이 계속되자 불교는 산 속으로 운둔하여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무학 자초(無學 自超)는 조선시대의 최초이자 최후의 왕사이다. 18세에 출가하여 1353년에 원에 가서 인도승 지공과 고려승 나옹을 만나고 1356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나옹의 선법을 전수하고 여주 고달산에 초암을 짓고 은거하다가 태조가 즉위하지 왕사에 임명되었다. 자초의 법을 계승한 승려가 득통 기화(得通己和)이다.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에 출가하였고, 주로 화암사에서 수행하였다. 1414년에는 평산 자모산 연봉사에 작은 거실을 마련하여 함허당(涵虛堂)이라 칭하고 <금강강오가해설의>를 강의하였다. 특히 <현정론>을 저술하여 불교를 배척하던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반박하였다. 보우(普雨)의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이다.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에 출가하여 금강산 일대에서 수행하였다. 1548년에 강원감사의 천거로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51년에는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되어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지정하였다. 또 도첩제를 부활시키고, 1552년에는 연산군 때 폐지되었던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유생들을 이러한 불교정책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계속 올렸다. 1555년에 보우는 모든 직책을 사양하고 춘천 청평사에 은둔하다가 1560년 다시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1565년에 문정왕후가 죽자 율곡을 비롯한 유생들이 곧바로 보우의 탄핵과 불교정책의 폐지를 강력하게 상소하여 명종은 그를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이듬해 선교양종과 도첩제와 승과제도는 폐지되어 불교인들은 흩어졌지만 짧은 기간 동안 승과에서 휴정, 유정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청허 휴정(淸虛休靜)은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주로 머물렀으므로 서산대사라고도 한다.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평안도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으로 와서 12세에 성균과에 입학하였다.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숭인(崇仁)을 만나고 다시 영관(靈觀)에게 3년간 수학하였다. 27세(1546)에 지리산을 떠나 오대산, 금강산에서 수행하였다. 휴정은 33세 되던 해인 1552년에 새로 부활한 승과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었다. 이 해를 전후로 조선사회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불교를 배척하였던 중종에 이어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1년도 못 가서 세상을 떠났다.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정사를 대신하면서 불교 부흥정책을 추진하여, 1551년에 선교양종을 부활시키고 보우를 선종판사에 임명하였다. 이어 도승제와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는데 휴정은 이 승과에 합격하였던 것이다. 승과에 합격한 지 3년만에 휴정은 교종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총책임자인 교종판사가 되었고, 3개월 후에는 선종판사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양종판사를 사양하고 금강사으로 들어갔다. 40대 후반에서 60대 후반에 이르는 동안 휴정은 묘향산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그가 73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평안도 의주로 피난한 선조는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휴정을 팔도선교십육종도청섭에 임명하였다. 이에 휴정은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어 승군을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도 순안의 법흥사를 본거지로 하여 1500여명의 승군이 모였고, 그의 제자 유정도 1000여 명의 승군을 이끌고 관동지방에서 와서 도청섭의 승군과 합세하였다. 유정은 승군의 대장이 되어 일선에서 실전을 지휘, 평양성을 탈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2년 후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과 치영 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에 들어갔다. 85세 되던 해인 1604년 정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대중들을 불러 법을 설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저서에는 <선가귀감>, <선교결>, <선교석>, <청허당집> 등이 있다. 휴정의 제자 1000명 가운데 뛰어난 제자가 70여명이었고, 그 중에서도 사명 유정, 편양 언기, 소요 태능, 정관 일선은 사대파(四大派)를 형성하였다. 휴정과 그 문하에 의해 조선불교는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교리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많은 종파들을 통합하였고, 산 속에서 하나의 선풍을 형성하여 그 법맥을 이어 나갔다. 사명 유정(泗溟 惟政)은 13세에 황악산 직지사에 출가하였다. 1561년에 승과에 합격하여 직지사 주지를 역임하고, 1575년에는 봉은사 주지를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로 선교양종판사에 임명되었고, 임진왜란 후 강화사절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편양 언기(鞭羊 彦機)는 11세에 출가하여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하고 그의 선법을 이어받았다. 그의 시문이나 선교에 대한 법문은 매우 간결하고 쉬운 것이 특징이다. 선과 교에 대해서는 휴정의 관점을 이어받았다. 선 은 부처님의 마음을 전한 것으로 최상의 근기를 가진 중생은 들어갈 수 있지만 그러한 중생이 많지 않으므로 임시로 교를 빌린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는 근기가 낮은 중생이 선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고 하였다. 모든 경전은 중생의근기에 따라 다양하게 설한 것이므로 처음부터 소승, 대승과 깊고 얕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르침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청정한 성품이라고 하였다. 이 성품을 깨닫는 방법에는 화두, 자신의 성품에 대한 관조, 염불이 있다고 하였다. 소요 태능(逍遙 太能)은 13세에 백양사에 출가하였다. 부휴 선수에게 수학한 후 묘향산 휴정의 문하에 들어가 20여 년동안 수행하여 그의 선법을 이어받았다. 휴정의 제자 중에서 편양 언기와 함께 선의 양대 고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문하가 소요파를 형성하였다. 정관 일선(靜觀 一禪)은 15세에 출가하여 <법화경>에 심취하였고, 이어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개탄하고 유정에게 글을 보내 ‘전쟁이 끝났으니 빨리 관복을 벗고 승려의 본분을 다하라’고 권고하였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