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시대사적 불교의 전파(2)

관리자 | 2006.08.17 08:09 | 조회 927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서 삼국 중 가장 입지조건이 불리하고 약소하던 신라가 태종 무열왕 7년(660)에는 백제를, 문무왕 8년(668)에는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로부터 6, 7년 사이에 당의 세력을 몰아내어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지금까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 불교는 통일신라시대에 고유신앙과 결합하면서 민중 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갔다.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전성기는 30대 문무왕에서 36대 혜공왕까지이며, 그 이후는 침체기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그리고 무애(無碍)사상을 제창하였고, 665년에 당에서 귀국한 혜통(惠通)은 밀교를 전하였으며, 671년에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676년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을 널리 전파하여 해동화엄의 초조가 되었다. 691년에 귀국한 승전(勝詮)은 당의 현수 법장이 지은 <화엄경탐현기> 등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성덕왕 때에는 봉덕사를 건립하여 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인왕도량(仁王道場)을 베풀었고, 또 751년에는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였다. 경덕왕 14년(755)에는 분황사에 약사여래를 조성하였다. 이 당시의 신앙형태는 특정한 부처나 보살에게 국한되지 않고 여러 불보살을 한꺼번에 믿고 예배하거나 아미타불, 약사여래 또는 미륵이나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등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신앙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였다. 그와 함께 약사여래, 아미타불, 미륵불, 석가모니불을 사방불(四方佛)로 신봉하는 사방불신앙도 나타났다. 이처럼 경덕왕 때부터는 교학연구보다는 불보살에 대한 영험담이 성행하여 불교는 점점 타력신앙적인 경향으로 전개되었다. 또 경덕왕 때에는 왕실이나 귀족들을 위한 사찰이나 불탑, 불상 등의 조성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찰을 원찰(願刹)이라 하였는데, 특히 왕실의 원찰에는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거나 국가에서 관료를 파견하였다. 태현(太賢)은 유식학에 정통하여 <성유식론학기>를 저술하였고, 진표(眞表)는 지금까지의 교화활동과는 다른 점찰법회(占察法會)를 크게 일으켰다. 이 법회는 중국에서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점찰선악업보경>에서 설하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참회의식이다. 점찰법회는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고대사회부터 행해졌던 주술과 점복이 불교의 참회법과 결합된 의식이다. 그러나 혜공왕 이후부터 불교는 점차 침체되어갔다. 그러한 가운데 830년에 당에서 진감(眞鑑)이 귀국하여 쌍계사를 중심으로 선법을 전파하였다. 9세기로 접어들면서 수용되기 시작한 선은 이미 진덕여왕 무렵에 법랑(法朗)이 중국 선종 제4조인 도신의 선법을 전래하였고, 이어서 신행(神行)은 신수의 북종선을 전래하였으나 수용되지 못하였다. 선이 신라에서 성행하게 된 것은 마조 문하의 선법을 지장(智藏)으로부터 전해 받은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이 귀국한 이후의 일이다. 그 후 계속 당에서 남종선을 전수 받은 유학승이 귀국하면서 고려에 이르러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하게 되었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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