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시대사적 불교의 전파(1)

관리자 | 2006.08.17 08:07 | 조회 942
1. 개 요 인도문화권을 넘어서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에 전파된 불교는 또다시 동쪽의 중국에 전래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유교나 노장사상 등의 고유사상과 융합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중국불교는 동아시아 전지역 즉 한국, 일본, 발해,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동아시아 불교권의 공통점은 한역 대장경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역 대장경을 근본 경전으로 삼고 교리의 연구나 발달도 한역경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중국, 한국, 일본불교가 공통적이다.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특징은 통불교(通佛敎) 즉 종합불교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원효의 불교사상은 화엄, 법상, 삼론, 정토가 서로 융합되고 회통된 것이다. 이러한 통불교적 성격은 한국불교의 전통이 되었다. 보조국사 지눌은 교선(敎禪)일치의 종풍을 수립하고 교학과 좌선을 하나로 종합시켰다. 한국불교의 정치적, 사회적 특징은 호국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대략 4세기 경으로서 왕실의 귀의를 받아 호국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신라 진평왕 23년에 시작한 법회에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와 팔관재회(八關齋會)가 있다. 백고좌법회는 <인왕반야바라밀다경>의 설을 따라 내란과 외환 등의 악운을 물리치고 왕실과 국가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행한 법회였다. 팔관재회는 재가신도가 팔계(八戒)를 받고 하루 낮과 밤 동안 그것을 지키는 불교의식이었으나 신라에서는 전사한 병사들의 명복을 빌거나 토속신을 섬기는 의식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이념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것은 원광의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이후 이러한 호국 불교적인 전통은 계속 이어져 고려시대에는 침입한 몽고에 대항하여 적국항복의 원이 담긴 대장경이 조판되었다. 부처님의 가호를 기원하며 조판된 <고려대장경>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 사명 등의 승려들이 전투에 참가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웠다. 신라의 호국정신이 조선시대까지 그 맥을 이어간 것이다. 2. 삼국(三國)시대의 불교 고대 삼국은 주로 자연신을 섬기는 고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하늘과 해님을 대상으로 했던 천신이나 명천(明天)을 환인(桓因) 또는 천제(天帝)라는 불교적 인격신으로 정착시켰으며, 또 창공이나 영성(靈星) 등의 숭배가 인간 수명와 화복을 주재한다는 북두 칠성신앙으로 되고, 하천이나 해수 및 농경에 관계된 모든 신의 숭배는 용왕신 신앙으로, 산악 숭배는 산왕신 신앙으로, 가옥신은 조왕신앙 등으로 정착되었다. 지금까지의 자연신적 신앙이 불교화되고 모든 신과 이에 대한 신앙이 불교신앙의 범주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불교라는 외래종교가 기존의 고유신앙을 흡수하여 새롭게 전개된 것이다. 삼국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므로 삼국의 많은 학승들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求法)활동을 하였고, 또 그곳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혹은 중국학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불교의 영향으로 삼국시대에는 삼론(三論)을 비롯한 여러 교학의 학자가 많았으며 화엄, 법화, 열반 등의 경전도 성하였다. 특히 백제에서는 독자적인 율전(律典)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불교는 삼국에서 성대하게 발전하였다. 고구려의 불교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소수림왕 2년(372) 전진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과 불경을 전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374년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왔으며, 이듬해 왕은 초문사(肖門寺)를 세워 순도를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 391년에는 왕이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교하였고, 이어 광개토왕은 즉위 2년(392)에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396년에는 동진에서 담시(曇始)가 불경 수십부를 가지고 요동에서 교화한 후 삼귀계(三歸戒)를 주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장수왕 때 중국으로 간 승랑(僧朗)은 그 곳에서 삼론학을 연구하여 학문적인 체계를 세웠고, 섭산 서하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 때 그의 명성을 들은 양 무제는 우수한 학승 10명을 뽑아 승랑에게 수학하게 하였는데 그 가운데 승전(僧詮)이 가장 뛰어나 그의 법을 이었다. 595년에 일본으로 간 혜자(慧慈)는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曇徵)은 불교와 오경(五經), 색칠하는 법 그리고 종이와 붓 만드는 법을 전하였다. 또 652년에 일본으로 간 혜관(惠灌)은 백제 관륵의 뒤를 이어 일본 제2대의 승정이 되었고, 삼론학을 널리 전파하여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의 불교 백제에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滅難陀)가 동진에서 옴으로써 불교가 전해졌다. 그는 이듬해 남한산에 절을 짓고, 10명의 승려를 배출하였다. 그 후 392년에 왕은 고구려에서와 마찬가지로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교하였다. 526년에는 인도에 유학갔던 겸익(謙益)이 범본 논서와 율부를 가지고 인도 승려 배달다(倍達多)와 함께 돌아왔다. 율부 72권이 번역되자 담욱(曇旭)과 혜인(惠仁) 두 승려는 그에 대한 주석서 36권을 저술하였다. 552년에는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고, 577년에는 불경과 율사를 일본으로 보냈으며, 602년에는 관륵(觀勒)이 천문, 지리, 역서 등을 전하였다. 신라의 불교 눌지왕 때 고구려를 거쳐온 묵호자(墨胡子)에 의해 지방에 불교가 전해졌다. 그 후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려고 하였으나 고유신앙을 받들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불교로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고 했던 법흥왕은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배척하던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불교공인은 선포했다. 544년에는 흥륜사의 완공과 더불어 출가를 국법으로 허락하였고, 549년에는 양으로 유학갔던 각덕(覺德)이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551년에는 승통 혜량(惠亮)이 처음으로 백고좌강회와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565년에는 진으로 유학갔던 명관(明觀)이 1700여권의 경론을 가지고 돌아왔다. 또한 566년에는 황룡사를 비롯하여 기원사, 실제사 등의 사찰이 건립되었다. 특히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신라불교의 중심이 되었고 그 곳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봉안하고 9층탑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진흥왕은 불교를 근간으로 하여 청소년의 수련 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이 단체의 최고 우두머리는 국선이었고, 그 아래에 각각 소단체의 우두머리인 화랑이 있어 한 무리의 낭도를 거느렸는데 낭도에는 한 사람의 승려 낭도가 있어 국선을 보좌하였다. 또 576년에 귀국한 안홍(安弘)은 <능가경>과 <승만경> 등을 가지고 왔고, 600년에는 원광(圓光)이, 605년에는 담육(曇育)이 귀국하였다. 원광은 589년 진에 가서 <열반경>, <섭대승론> 등을 배우고 귀국하여 <여래장경사기>, <대방등여래장경소>를 지어 불교의 새로운 지식을 신라에 전했다. 자장(慈藏)은 당에서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643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분황사와 홍룡사에 머물면서 <섭대승론>과 <보살계본>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대국통이 되어 교단의 질서를 확립하였고 황룡사에 9층탑을 건립하여 불교 신앙의 심화를 통해 국가의 안전과 평화를 기원하였다. 자장은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金剛階段)을 만들어 계율을 널리 설함으로써 많은 백성들이 불교를 신봉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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