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서원의 중요성

관리자 | 2006.08.15 08:22 | 조회 1015
서원의 중요성 굳이 경건한 종교적 자세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기 나름의 크고 작은 원(願)을 세우고, 그 원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 더 이상 세울 만한 원도 떠오르지 않을 때, 삶 자체가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된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내가 이 모양으로 있게 된 데에는 어쨌거나 숱하게 교차해 갔던 원들과 그것들에 대한 나의 태도가 크게 작용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때, 우리는 운이 좋았다거나 나빴다고 하여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린다. 운명이라는 게 자신을 위안하는 편리한 변명거리요 도피처이긴 하지만, 그 위안은 무책임한 것이라는 점을 떠나서도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운명 탓으로 돌린 위안이 흡족치 못하거든 다시 그간의 삶을 반성해 보자. 이런 반성에서는 자신이 전에 세웠던 원의 질과 그 원을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 왔는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무지개 같은 원을 세우긴 했지만, 그것을 하나의 희망사항으로 방치하면서 요행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뭔가 부지런히 애쓰긴 했지만, 그렇게 하여 달성하고자 했던 원이 비도덕적이거나 비사회적인 것은 아닌지? 아니면 원이란 게 쉽게 달성되는 것이 아님을 먼저 알아차리고서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적당히 대처해 오지 않았는지? 그렇게 반성해 보면, 젊거나 늙음의 나이에 관계없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좋은 원을 세워야하며,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계속 노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실현까지는 확인할 수 없더라도 노력하고 있다는 자체로도 위안을 주는 그런 원이라면 정말 ‘좋은 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소원 또는 희망이라는 말로 많은 원들을 세우지만, 그에 대한 절실한 결의까지 동반하지는 않기 마련이다. 이는 아마도 그것을 진정 ‘좋은 원’이라고 확신하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확고한 결의가 없는 원은 단순한 기대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자신을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좋은 원’을 세우고, 이에 대해 끊임없이 자기 확신에 의한 확고한 결의를 다지면서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불교 특유의 관념이 ‘서원’(誓願)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가장 바람직한 이상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 서원이다. 그리고 이 서원의 요지는 스스로 부처가 됨과 아울러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이다. 그 구제는 널리 모든 중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서원은 홍서(弘誓) 또는 홍원(弘願)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서원을 일으키는 것이 발원(?願)인데, 보살이 발하는 보리심, 즉 발보리심의 내용에 상당한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집약되어 불교라는 종교가 형성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서원을 불교 신앙의 핵심으로 인식하면서부터 기존의 불교는 대승불교라는 보다 차원 높은 종교로 변신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상에 가장 적합한 인간상이 보살로 부각되고, 이 보살은 성불이라는 개인적 목표 달성에 노력함은 물론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타인을 성불로 이끌어 구제하는 일에도 몸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일은 보통의 각오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런 나름대로의 확고한 각오를 다져 맹세하는 일이 중요하다. 바로 이러한 자세를 일컬어 서원이라 하며, 서원을 세우는 발원은 보살이라 불릴 수 있는 필수조건이 된다. 이제 이는 불교도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사홍서원의 실천 우리가 믿는 대승불교는 실로 서원으로 이루어진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서원이 없는 부처?보살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서원들을 크게 셋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보살이 과거에 일으킨 서원을 본원(本願)이라 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많은 부처님들은 그 본원을 실천하여 부처가 된 것이다. 또 각각의 부처?보살에게는 저마다 세운 원이 있는데, 이를 별원(別願)이라 한다. 예를 들면 아미타불의 사십팔원(四十八願), 아촉불의 이십원(二十願), 약사여래의 십이원(十二願) 등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모든 보살에게 공통되는 서원을 총원(總願)이라 한다. 바로 사홍서원(四弘誓願)이 그것이다. 모든 보살의 서원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리하면 네 가지가 되기 때문에 ‘사홍서원’라 불린다. ①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이 아무리 끝없이 많아도 모두 구제하겠다. ②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誓願?). 번뇌가 아무리 다함이 없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끊겠다. ③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 법문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모두 배우겠다. ④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道無上誓願成). 부처의 도가 아무리 높고 멀더라도 모두 성취하겠다. 우리는 법회 때마다 위와 같은 사홍서원을 봉창하면서도 그것이 너무 거창하여 그냥 구호로서 내세우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도 아직 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모든 중생까지 구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 법하다. 그렇다면 그 자기라도 먼저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중국 혜능(?能)대사의 설법을 기록한 육조단경(六祖壇?)의 설명을 귀담아 듣는 것이 좋겠다. “중생을 건진다 함은 내가 그대들을 건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다. …저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건지는 이것이 참으로 건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기 마음을 스스로 건질 수 있을까? 자기 마음속의 그릇된 소견과 번뇌와 무지를 바른 견해로써 건진다. 바른 견해는 지혜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스스로 건지게 한다. 그릇됨이 오면 올바름으로, 미혹이 오면 깨달음으로,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악이 오면 선으로 건지는 이것이 참으로 건짐이다. 그리고 번뇌를 끊는다 함은 자성의 지혜로 허망한 생각을 없앤다는 것이고, 법문을 배운다 함은 스스로 성품을 보아 항상 바른 법을 행하는 것이다. 또 불도를 이룬다 함은 항상 마음을 낮추어 참되고 바르게 행동하며, 미혹도 버리고 깨달음에서도 떠나 항상 지혜를 내며, 참된 것도 망령된 것도 없애어 바로 불성(佛性)을 보면 곧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역시 차원 높은 설법이지만,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사홍서원의 실천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결의가 없는 실천은 없다. 그 결의를 항상 다져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깃들게 할 때, 그것이 우리의 행동을 이끌고 갑옷처럼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그래서 서원은 ‘소를 잘 부리는 자’ 또는 ‘갑옷’으로 비유된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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