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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설과 연기설 (1)

관리자 | 2006.09.08 07:17 | 조회 1571

업보와 연기

중도설은 그내용이 당시의 업설에 대한 비판이며 불교의 업설을천명한 것이다. 자작중도와 타작중도는 업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 것이 동일한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에 대한 것이었고 일이중도와 유무중도는 업을지어그 과보를 받는 상주불멸하는 육신과는 별개의 영혼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세존은 이러한 당시의 업설을 사견으로 규정하고 정견으로 연기설을 주장했다.따라서 연기설은 불교의 업설이라 할수 있다.

 

십이연기의 유전문은 무명으로 살아가면 괴로움이 나타난다는 업보를 설명한것이고 팔정도는 정견으로살아가면 열반을 성취한다는 업보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업설에 대하여 혹자는 불교가 연기설에 근거하여 무아를 주장하기 때문에 업설이 민중교화를 위해 편의상 당시의 총속적인 종교관념을 채택한 것으로 불교의 근본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업설과 무아설을 양립할수 없는 모순 관계에 있다고 본다. 업설은 윤회사상의 기초가 되는 사상이며, 윤회설은 윤회하는 주체로써 상주불멸하는 자아의 존재를 전재로 하고 있는데 연기설에 기초한 무아설은 그러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업설과 무아설은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중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것이다.연기걸은 유무중도입장에서 이야기 된 것으로 연기설에 근거한 무아설은 중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한다. 만약 무아설을 업보에 의한 윤회를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세존의 사견으로 단정한 단견이므로  결코 정견이 아닌 것이다.

 

<별역잡아함202경>은 연기설이 곧 불교의 업설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일체중생은 모두가 유위로써 여러인연이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요. 인연이란 업을 말하는것이요...........중략

 

그대들이 주장하는 일체의 모든것은 상존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이것이 거짓이라는 말은 자아의 존재를 상상으로 꾸며 놓았기 때문에 하는 말로써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요..

이 모든사견을 탐착하면 이는 괴로움에 상응하는 것으로 큰 괴로움을 받나니, 생사 가운데서 무궁한 괴로움을 받는 것은 모두가 자기존재를 꾸며 놓기 때문이요... 이와같은 모든견해는 사실은 유위이며, 업이 모인것이며, 인연이 화합한것이요. 모든존재는 무상이요. 무상이므로 괴로움이요. 괴로움이므로 무아임을 알아야하오.

 

이경은 당시 외도들과 수달다라고 하는 재가불자사이의 대화이다.수달다는 급고독원을 지어 세존에게 시주한 사위국의 거부로써 급고독원장자로 놀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세존에게 공양하러가던 도중에 때가 일러서 세존이 선정중일거라고 생각하여 먼저 외도들이 있는곳으로 가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외도들은 세존께서 사견으로 규정하고 묵살했던 문제에 대한 수갈다의 견해를 물었다.

 

이에대한 수달다의 대답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세존은 십이연기를 이야기하여 외도들이 문제삼고 있는 세간, 영혼, 육신등의 존재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으로 이들 논의가 말장난에 지나지 않은 무의미한 것임을 밝혔다. 그론데 이경에서 수달다는 이들 존재가 인연에 화합하여 존재하는 유의라고 이야기하면서 인연은 업을 이야기 한다고 하고 있다.

 

 연기란 인연생기의 의미이므로‘인연이 화합하여 존재한다는 말은’연기한 존재이다‘하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그리고 ’유의‘ 란 무명에서 연기한 망상으로써의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중생이나 새간,영혼,들이 인연화합에 존재하는 유의’하는 말은 이 들이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인연이 업을 의미한다면, 이말은 다시‘ 모든 존재는 진리에 무지한 상태에서지은 업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된다. 따라서 연기는 ’업보‘와 같은 의미라고 할수 있으므로 연기설은 불교의 업설이라 할수 있다.

 

 

 

무상,고,무아

무아는 업보에 업을 짓고 보를 받는 시간적 존속성을 지닌 실체가 없음을 의미 한다.업은 실체 가 아니라 잠시도 머물지않고 끈임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삶이다. 업이 끊임없이 변하지 않으므 로 그 경과인 과보도 끊임없이 변화 한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화 하는 것 을 무상 하다고 한다.이 무상한 현상을 중생들은 시간적으로 일정기간 혹은 영원히 머물고 있는 자아와 세계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는 중생들의 신념과 관계없이 업의 경과로 무상하게 변해 간다.이러한 변 화가 중생들에게 생로병사와 생사윤회로 느껴진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을 통해 괴로움의 근거를 찾아보면 괴로움은 실체가 없어 연기하는 무상한 것을 자아로 집착함으로써 나타나게 된것임을 알수 있다. 즉 괴로운 것은 무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며 괴로운 것은 무아라는 말은 이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무상, 고, 무아는 논리적인과 간계가 아니라 실천적 인과 관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상의 의미이다.세존은 모든 것은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는 무상 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세존이 사견이라고 배 척한 외도들의 주장 가운데도 '일체는 무상 하다' 는 주장이 있다. 외도가 주장하는 무상과 세존이 주장하는 무상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세존이 일체는 무상하다고 했을때의 무상은 anicca를 한역한 것이고 외도들이 일체는 무상하다 고 했을때의 무상은 assassata를 한역한 것이다. 한문으로는 다 같이 무상으로 번역되었지만 원어는 다르다. asassata는 영원한 상주하는의 의미인 sassata 에 부정접두사인 a가 붙어 sassata를 부정하는 말로서 영원하지않은 언제인가는 없어지는의 의미이다.

 

한편 anicca는 계속적인 불변의 의미인 nicca에 부정 접두사 a 가 붙어 nicca를 부정하기때문 에 지속성이 없는 변화하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외도가 이야기 하는 일체는 무상하다는 말 은 모든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동안은 존재하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 이고 세존의 이야기느 하는 일체는 무상하다는 말은 모든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으므 로 잠시라도 지속하고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외도들이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은 없지만 육신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지속적으로 존 재한다는 의미에서 일체는 무상하다 라고 주장했다면 세존은 영혼이건 육신이건 시시가각 변 해가므로 한순간 지속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일체는 무상하다고 이야기 한것 이다.

 

따라서 외도들은 육신이 죽으면 우리의 삶은 끝이라는 단견을 갖게 되었지만 세존은 죽고 사는 실체는 없지만 업에 따라 변화하는 삶은 단절이 없다 는 의미에서 단견을 배척했다.이러한 견해 는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않고 다음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외도의 상견과는 다르다.상견 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자아를 인정했지만 세존은 그러한 자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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