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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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이란 무엇인가

관리자 | 2006.06.08 10:32 | 조회 1221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조건’을 없애라는 희망의 가르침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의는 연기법이라 할 수 있다.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보고, 여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는 가르침은 부처님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비로소 붓다가 되었으며, 동시에 그 깨달음의 핵심이 바로 연기법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연기법은 대개 괴로움(老.死.憂.悲.苦.惱)이 성립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유전(流轉) 연기’와 괴로움이 소멸하게 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환멸(還滅)연기’의 두 방식으로 설해진다.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연하여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을 연하여 촉(觸)이 있고,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를 연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연하여 취(取)가 있고,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고,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고, 생을 연하여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가 있다”는 순서로 설해지는 것이 유전연기다. 반대로 “무명이 멸(滅)하므로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므로 식이 멸하고, 생이 멸하고, 노사우비고뇌가 멸한다”는 순서로 설해지는 것이 환멸 연기이다. 연기법은 설명의 편의상 보통 유전 연기로 설해지지만, 연기법의 본래적이고도 근본적인 의의는 오히려 환멸 연기에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초기경전상의 연기설은 오랜 불교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업감(業感)연기설, 아뢰야식(阿賴耶識)연기설, 진여(眞如)연기설, 법계(法界)연기설, 육대(六大)연기설 등으로 전개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는 가르침은 흔히 ‘연기의 기본공식’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이것은 초기경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형태의 유지(有支)연기, 즉 5지연기, 6지연기, 8지연기, 9지연기, 10지연기, 12지연기 등을 총괄한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유지연기는 이른바 12(지)연기로 정형화된다. 그런데 연기의 기본 공식 가운데서 특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此有故彼有)’는 구절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물과 존재의 상호의존성 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으로 설명되며, 이것은 곧 연기법의 근본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불교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연기법이 상호의존성이나 상의상관성으로 이해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연기법에는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는 불교의 총체적인 사상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전문을 환멸문으로 전환해야 해탈 존재의 상의성 깨닫고 집착 벗어나야 그러나 상호의존성이라는 의미로서의 연기법의 경전적 근거로서, 초기경전의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를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차유고피유는 일반적으로 12연기를 공식화한 표현으로서, 12연기 중에는 물론 식과 명색의 관계에서처럼 상의성(相依性)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식과 명색을 제외한 다른 항목사이에서는 상의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있다’는 성립하지만 ‘행이 있으므로 무명이 있다’는 성립하지 않는다.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다’는 성립해도 ‘노사가 있으므로 생이 있다’는 맞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우이하꾸쥬(宇井伯壽)는 ‘imasmim sati idam hoti’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것의 번역문인 차유고피유의 피는 원문에서는 모두 차(idam)이기 때문에 원문대로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로 번역해도 좋고 또는 피와 차를 바꾸어 ‘피유고차유(彼有故此有)’라고 번역해도 좋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차유고피유 등은 결코 독립적인 문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yadidam, 謂, that is to say)라고 하는 낱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뒤의 구체적인 12연기의 지분들에 대한 공식적인 표현일 뿐이다. 또한 idam의 용례상 이것은 꼭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말의 경우에도 A, B, C 등이 서로 다른 대상물이지만 이것들이 서로 근접해 있을 때는 모두 ‘이것’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우이하꾸쥬는 ‘idappaccayata’를 ‘상의성’으로 번역함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idam은 ‘이것’(此)의 의미이지 ‘서로’(相)의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차연성’(此緣性) 또는 ‘차의성’(此依性) 정도의 의미인 것이며 idappaccayata라는 말도 역시 12연기의 내용을 설하는 가운데 등장하고 있어, 문맥상으로 보면 12연기의 특징에 대한 표현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문맥상으로 보면 ‘차유고피유’의 근본 의미는 상호의존성이라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초기 불교의 연기법은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의 내용을 동시에 포함하는 구제론적.종교적 성격이 강하다. 이것은 원래 ‘노사등의 모든 괴로움은 연기한 것이므로 연멸(緣滅)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르침이요 희망의 진리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깨달은 직후, 부처님이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노라. 나는 모든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났노라”라고 선언한 것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요컨데 연기법은 “모든 괴로움은 절대적.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연기되어 있으므로, 그 조건과 원인을 파악하여 괴로움을 극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으며, 그 괴로움의 근본원인은 인간 스스로의 ‘진리에 대한 무지[無明]’이며 ‘끝없이 타오르는 욕망의 불꽃[貪愛]’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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