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나한신앙 이란?

관리자 | 2006.06.09 11:01 | 조회 1476
나한 신앙
나한은 ‘성자’의 뜻… 선종흥기 때 대중화
사진설명: 경북 영천 은해사(銀海寺) 거조암(居祖庵) 오백나한전의 나한상. 불교신문 자료사진






















나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성자를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불성이 있기 때문에 ‘부처’ ‘보살’ ‘나한’ 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각자(覺者)라는 점에서는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누구든지 일심으로 공부해서 나한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나한 역시 여러 불보살처럼 신통력을 갖춘 존재로 받들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보살과 다른 점은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나한들은 대개 실존인물이라는 것이다.

나한 신앙이 꽃을 피운 중국에서는 도교와 결합돼 신선처름 묘사되거나 선종의 조사가 나한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한국 역시 나한은 복을 비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관음 미타 지장 등 다른 신앙에 흡수돼 이들과 구분이 쉽지않다.


부처님 聲聞제자… 후대에 성격 변화

관음.지장신앙에 흡수돼 많이 약화



아라한(阿羅漢)은 범어 아르한(arhan)의 음역으로 보통 줄여 ‘나한’(羅漢)이라고 한다. 아라한을 응공(應供)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외 살적(殺賊).불생(不生).응진(應眞).진인(眞人).성자(聖子) 등으로 의역한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번뇌를 끊고 불생(不生)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진리에 상응하는 이’로 모두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불교가 일어난 시기에, 인도에서는 각 종교마다 존경하는 수행자의 호칭이 있었다. 가령 자이나교에서는 아라핫드라고 불렀다. 따라서 처음에 아라한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부처님을 부르는 열가지 명칭(十號) 중의 하나가 응공(즉 아라한)인 것을 볼 때도 아라한은 부처님에 대한 별칭이었다. 그 뒤 부처님과 아라한이 구별돼, 부처님의 제자가 도달하는 최고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하게 됐다.

나한은 불교가 발달하면서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처음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 뿐이었다. 그 뒤 부처님이 성도한 뒤 최초의 제자가 된 교진여 등 다섯 비구가 아라한과의 경지를 얻었다. 이어 야사와 그의 친구 54인, 가섭과 그의 제자 등 당시는 깨달은 사람은 모두 나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나타나면서 나한은 소승의 성자로 격하됐다. 이타를 강조하는 보살에 비해 자신의 해탈을 추구한다는 이유에서 나한의 의미가 낮게 평가된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는 수행과 교학 연마에 몰두,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구사론’(俱舍論)을 정립한다. 유부의 승려들은 수행자를 네 단계로 설정하여 궁극 목표를 아라한과의 성취에 두었다. 적어도 인도에서 나한은 깨달은자라는 처음 의미를 그대로 지녔던 것이다.


대승불교 이후 ‘소승의 성자’로 격하


나한은 중국으로 건너가면서 신앙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나한은 그 수가 16, 500, 1200 등 다양하지만 보통 16나한과 500나한을 말한다.

16나한 신앙은 당나라 현장스님이 서기 645년에 번역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에 기초한다. 〈법주기〉는 부처님 열반후 800년 경에 난제밀다라(難提蜜多羅) 아라한이 쓴 것이라고 한다.

〈법주기〉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16인의 나한에게 불멸(佛滅) 이후에도 영원히 이 세상에 머물며 각지에서 불법을 수호하며 중생을 제도하라는 부촉을 내린다. 이들은 모두 삼명(三明), 육통(六通), 팔해탈(八解脫)의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어서 삼계의 오탁에 물들지 않는다.

학문은 경율론 삼장은 물론 외도의 경전에도 능통했다. 신통력도 지니고 있다. 중생들을 위해서는 참된 복전이 되었다.

사람들이 바른 마음을 일으켜 스님들을 위하여 큰 법회나 5년마다 무차대회를 열거나, 스님들을 초대하여 법회를 열면 십육나한과 권속들은 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공양을 받으며 시주자에게 커다란 과보를 얻도록 하였다. 대승의 보살이 하는 역할과 똑 같다.

보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 16명은 집단적으로 숭배 받는다는 것이다. 16나한은 4명의 나한이 확대된 것이다. 〈미륵하생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대가섭, 군저발탄, 빈두루, 나운 4비구가 4명의 아라한이다. 부처님이 이 4명의 비구에게 정법을 부탁하여 열반에 들지말고 영구히 세상에 남아 정법을 수호하여 미륵보살님의 출현을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미륵하생경〉이 서기 3세기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보아 대승불교가 융성하면서 4대 아라한에서 16아라한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소승불교에서 나오고 부파불교의 수행자가 된 나한은 이처럼 보살과 다름없는 역할로 인해 중국 한국 일본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나한신앙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16나한과 더불어 나한신앙의 한축을 맡고 있는 500나한 역시 중국의 산물이다. 오백나한에 대하여는 여러 경전에 기록이 있는데 〈증일아함경〉이나 〈십송률〉(十誦律)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인도 코살라국의 사위성에서 500명의 나한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고 한다.

〈흥기행경(興起行經)〉에는 매월 15일 500나한을 위한 계(戒)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법화경〉의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서는 부처님이 500명의 나한을 위하여 특별히 수기(授記)를 베푸는 모습이 나온다.

〈오분율〉에는 부처님이 열반한 직후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의 칠엽굴에서 500명의 나한이 결집하여 불전을 편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제1결집을 오백결집이라 부른다. 부처님 열반 후 600년이 지난 뒤 열린 제4결집에 참가한 500명의 비구도 오백나한으로 받든다. 이외 중국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500나한에 포함시킨다.

중국의 나한신앙은 나한도 그림을 통해서 더 널리 퍼졌다. 특히 기우제에 많이 이용되었으며, 당말에는 나한을 공양하는 나한공(羅漢供)이 성행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나한 신앙이 성행하게 된 것은 선종의 흥기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성은(덕성여대)교수는 이에대해 나한의 평범한 외모, 신통력, 선종의 조사와 비슷한 캐릭터에다 지방 호족들이 단순하게 접근 할 수 있다는 점을 꼽고 있다. 선종(禪宗)에서는 실제로 불법의 전지자(傳持者)로 받들고 있다.

16나한은 다른 나한상보다 미술의 소재로 가장 많이 채택되었다. 16나한의 모습이 때로는 인간적이고 해학적이어서 표현소재로 다른 어떤 불보살상보다 적합했던 것이다.


해학적 모습… 인간적 친숙함 느껴져


나한신앙이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오대산 신앙과 관련하여 오대산 오만진신(五萬眞身) 중에 북대 상왕산에 석가여래와 오백나한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것이다. 나한신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고려부터다.

고려에서는 923년 태조가 양나라에 보낸 사신 윤질이 5백나한상을 가지고 귀국,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봉안한 이후부터 고려왕실에서는 1053년 문종이 신광사에서 나한재(羅漢齋)를 베푼 것을 시작으로 무려 28회의 나한재를 베풀었다.

나한재를 베푼 주 이유는 기우제였다.이외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거나 국왕의 장수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구복 중심이었다. 나한재는 진관사의 수륙재와 길상사의 나한재가 병행돼 개설된 것처럼 진혼의식으로 치러졌다. 조선초 왕실에 의해 각 사찰마다 나한상을 조성하거나 나한전을 건립하는 일도 잦았다. 조선후기 역시 구복을 중심으로 발원자의 장수와 극락왕생 그리고 정각을 얻도록 하는 등 복합적인 성격으로 전개됐다.

정병삼 교수는 “신라말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한국의 나한 신앙은 선종의 흥성과 더불어 성행해,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재난구제로, 조선시대에는 기복과 함께 극락왕생과 깨달음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신앙의 한축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정교수는 “현재 나한신앙이 거의 사라진 것은 한국의 나한 신앙이 관음 지장 등 다른 신앙과 흡사해 그 속에 융화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나한도량은 경북 청도군 운문사, 서울 관악산 연주암, 서울 수유동 삼성암(三聖庵)을 들 수 있다. 특히 영천 은해사(銀海寺) 거조암(居組庵)의 석조 오백나한상이 유명하다.


/ 대표적 나한 빈두루존자

독성각에 모셔… 음식탐욕 경책


사진설명: 빈두루존자상.
지금도 중국 식당에는 16나한 중에서 첫머리에 들어가는 빈두루존자 상을 안치하고 있다. 그에게는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그는 한 재상의 아들로 태어난 미남자였다.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며 박식한 학문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또한 인자하고 사랑을 많이 베풀어 이웃의 아픔과 고통도 구원해 주었다. 그는 십선을 수행하고 삼보를 믿으며 출가하여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다.

〈십송률〉에는 한 거사가 그에게 밥을 가득 내밀었더니 얼른 다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를 식탐가로 묘사하는 이유는 음식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경책으로 보인다. 이처럼 중국 한국 등에서 음식과 관련된 나한은 대개 빈두루 존자다. 그의 풍모는 백발에 눈썹이 길다.

한국에서는 독성각이나 산성 칠성과 함께 삼성각에 모시는 나반존자가 빈두루존자라는 설이 많다.

육당 최남선은 단군이라는 주장을 펼쳤지만 생김새나 능력 말법시대에 출현한다는 이야기등이 빈두루존자와 같다. 조선후기부터 풍미한 독성신앙이 나한신앙의 한국적 특성인 것이다.


/ 나한전

16아라한 또는 500아라한 봉안


사진설명: 불영사 나한전.
나한을 모신 법당을 나한전 혹은 응진전 또는 영산전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봉안한다. 그 좌우로 16나한이 자유자재한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끝부분에 범천과 제석천을 함께 봉안하는 것이 나한전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16나한은 후불 탱화로 그려 봉안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경우에는 불단에 나한상이 없다.

후불 탱화에는 16나한도 이외에 영산회상도 많이 그려져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5백나한도 모신다. 이는 500비구가 모여 결집한 것을 나타낸다.

나한전은 대웅전과 달리 좁은 폭의 불단을 ㄷ자형으로 배치하여 부처님과 나한을 차례로 봉안한다. 깨달음의 정도가 낮아 불단을 장식하거나 절집을 장엄하지 않는다. 위치도 주불전에서 떨어져 있다. 보물 70호인 울진군 불영사(佛影寺) 응진전이 유명하다. 전북 완주 송광사(松廣寺)에는 대웅전에 오백나한전이 있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