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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약사신앙 이란?

관리자 | 2006.06.09 10:58 | 조회 1488
약사 신앙
“거룩한 의사이신 부처님 중생의 모든 병 낫게하소서”
사진설명: 팔공산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




약사신앙은 약사여래의 본원에 의지하여 병을 치료하고 수명 연장 등을 비는 대표적인 불보살 신앙에 속한다. 동방의 유리광세계(東方瑠璃光世界)를 교화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을 때 열두가지의 크고 거룩한 원을 세워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이다.

약사신앙의 소의경전은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이다. 약사신앙은 〈약사여래경〉을 달마굽다가 번역하여 유통시킨 이래 현장 삼장과 의정 삼장 등의 번역본이 나왔다.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국가적인 외호와 민간 신앙이 어우러져 널리 확산되었다.

약사여래의 열두가지 본원과 공덕 그리고 그 신앙의 이익을 설한 〈약사경〉은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의 줄임말이다. 약사여래는 범어로 ‘Bhaisajyaguru’라 하며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 의왕여래(醫王如來)라고도 한다. 〈약사경〉은 인도에서 3세기경에 성립돼 5세기경 중국에서 한역됐다. 약사신앙은 초기 대승경전인 〈법화경〉에 약왕보살 월광보살이 등장하는데서 보듯 불교 태동기부터 나타난다. 즉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약사신앙이 처음부터 밀교 계통은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중생 병고 없애 편안케 하리라”

약사여래 12대원에 근거… 신라때 성행



사진설명: 자비원만한 갓바위 부처님.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의학이 발달해 그 내용이 불교에 포함됐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를 대의왕(大醫王)이라고 부른다. 부처님 제자중 한명은 뛰어난 외과의사로 개복수술과 뇌수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부처님도 태자시절 제왕학의 일부로 의술을 배웠다. 사분율, 오분율, 십송율 등 율전에도 질병의 종류나 원인, 그 치료법, 약제 등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인도에서 약사신앙이 일찍부터 별도로 발전한데는 이같은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약사여래는 보살 시절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12가지 큰 서원을 세웠다. 이 속에는 약사여래가 단순히 중생의 병고를 구제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의복이나 음식 등의 의식주 문제는 물론 사도나 외도에 빠진 자, 파계자, 범법자 등까지 구제한다. 십이대원 이외에도 극락왕생을 원하는 자, 악귀를 물리쳐서 횡사를 면하고 싶은 자, 온갖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자들이 약사여래의 명호를 부르면서 발원하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외적의 침입과 내란, 성수(星宿)의 괴변, 일월(日月)의 괴변, 때아닌 비바람, 가뭄, 질병의 유행 등 국가가 큰 재난에 처했을 때도 약사여래의 본원력을 통하여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한다. 약사여래의 이같은 원력 때문에 약사여래는 대승의 중요한 신앙이 되었다.

경주 곳곳에 약사여래 불상

약사신앙은 미타 관음 지장 등 대승의 주요 신앙이 모두 담겨있는 것이 특징이다. 첫째 관음신앙의 현실구복 현세 이익적 특징이다. 질병이나 기근, 도적 등의 재난으로부터 벗어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둘째 〈지장경〉 〈아미타경〉 등 정토신앙적 특징이다. 약사신앙은 사후 극락에 대한 언급없이 불사(不死)만 치중하지만 아미타 신앙의 서방정토개념을 받아들여 동방 정토 사상을 언급하고 있다. 또 약사여래의 명호를 부르고 〈약사경〉을 지극한 마음으로 외우고 연설하는 공덕으로 죽음에 다다랐을 때 염라대왕의 판정을 기다리는 앞에서도 혼백이 또렷하여 정신이 혼미하지 않고 돌아와서는 선업을 쌓게 된다고 한다. 이는 〈지장경〉과 같다. 이 공덕으로 정토에 난다는 가르침은 〈아미타경〉과 같다. 셋째 호국적 성격이다. 약사여래 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독송하는 공덕으로 국가의 재난이나 질병 도적 등 환난이 일어났을 때 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고 외적이 침입했을 때 이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내용은 〈인왕경〉 〈금광명경〉과 같은 호국경에 나온 이야기다. 넷째, 밀교적 성격이다. 경전에는 7층등을 켜고 오색실을 달고 독경하면 다시 살아난다는 등 밀교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또 진언을 설하고 이를 지성으로 외우면 모든 병을 낫게 하고 성불에 이르게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한편 법인스님(대흥사 수련원장)은 “아미타경이 신라말에 이르러 현세구복적 성격을 띠면서 약사신앙이 이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약사신앙은 이처럼 관음 미타 지장 밀교 호국 등 여타의 대표적인 불교신앙을 고루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별도의 신앙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다른 신앙에 흡수됐다.

우리나라에 약사신앙이 들어온 것은 신라시대부터다. 밀본(密本)이라는 스님이 〈약사경〉을 읽고 선덕여왕의 병을 고쳤다는 〈삼국유사〉 내용이 전해온다. 약사신앙에 관한 문헌 자료는 이것 밖에 없지만 지금도 경주 곳곳에 남아있는 약사여래 불상을 통해 당시 약사신앙이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알 수 있다. 초기에 조성된 약사불이 소형 금동불인 것으로 미뤄볼 때 처음에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현세이익과 치병위한 신앙으로 발전

삼국통일 후 약사신앙은 현세이익적 성격과 치병을 위한 실천적 방법으로 일반민중에게도 그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전제왕권이 강화되는 중대(中代)가 되면 약사불은 통일시대 전제왕권의 상징인 사방불(四方佛) 가운데 동방불(東方佛)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약사신앙의 성격 중 정토신앙적 요소와 호국적 요소가 표면화된 것이다. 신라 하대(下代)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혼란이 심해지고, 기근.도적.질병 등의 재해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약사신앙은 급속히 퍼져나갔고, 그 결과 신라 하대에 특히 많은 약사불이 조성된다.

신라 사회에서 약사신앙이 유행한 사실은 일본인 승려 옌닌(圓仁)이 남긴 여행기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도 나타난다. 옌닌은 9세기에 당나라를 순례했는데 당시 당나라에는 마침 불교에 대한 탄압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는 순례 도중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신라인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고 승려에 대한 박해를 피해 신라방과 신라원에서 한동안 머물기도 했다. 그는 이 여행기에서 신라원에서 이루어지는 법회의 모습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이 의식에서는 〈약사경〉을 송경하는 절차가 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약사신앙은 밀교화되어 혜통이 창시한 밀교계통인 총지종은 약사여래를 주존불로 모신다. 약사신앙은 신라시대의 주요 교학사상에 모두 수용된다. 유식계통인 법상종 승려 경흥과 도륜, 태현스님이 약사경에 관한 소초를 남겼다. 원효계의 화엄종 사찰인 분황사에서 경덕왕 14년(755년)에 30만여 근에 달하는 거대한 약사여래동상을 조성한다. 약사신앙은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됐음을 말해준다. 신라 말기 선종도 약사신앙을 수용했다. 신라 말에 성립된 선종 9대산문 가운데 하나인 성주산문의 성주사에서 건립된 석탑 4기 중 하나가 약사여래사리탑이다. 가지산문인 실상사와 장곡사에는 약사여래철불이 조성됐다. 신라시대의 약사신앙은 이처럼 치병 등 구복과 질병 환난으로부터 보호 등을 희구하고 있다.

고려 시대에도 이와 같은 개인의 평안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위기가 닥칠 때마다 국가적 차원에서 약사도량이 자주 개설되었다. 1108년 5월과 8월에 ‘적병과 주변 오랑캐를 물리칠 것을 기원’하는 목적에서 〈약사경〉을 간경했다. 1254년 고종 41년에는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한 약사도량이 개설됐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국가 차원에서 약사도량을 개설했다는 자료가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상당수의 약사탱화가 조성되었다.

현재 약사신앙은 어떤 종파나 신앙 행태에 매이지 않고 모든 불교신앙에 흡수돼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한 요즘에도 치병에 대한 희구는 끊이지 않아 약사신앙은 지금도 신도들 사이에 널리 확산돼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약사불인 팔공산 선본사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는 것이 단적인 예다. 대구 동화사는 통일을 발원하는 목적에서 약사여래불을 조성해 고려시대 이후 사라진 호국의 목적에서 약사신앙을 되살렸다. 사찰에 따라서는 신도들 사이에 약사회(藥師會)라는 모임이 조직되기도 한다.


- 약사신앙과 십이지상의 관계

사진설명: 전등사 약사전.
도교에서 시간과 방위를 상징하는 12지는 약사신앙에 포함돼 12야차(夜叉)대장으로 형상화 된다. 12야차왕은 〈약사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끝나자 대중들 가운데서 열두야차대장이 나와 부처님께 자신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몸이 다하도록 삼보에 귀의하며 〈약사경〉을 널리 펼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약사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보호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해탈에 이르게 할 것’을 서원한 호법신장들이다.


12대원 상징… 12야차 형상화


즉 약사여래의 12대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라의 왕릉이나 고려 조선시대 왕릉 호석에서 발견되는 12지신상은 내세에도 영원히 약사여래의 본원력에 따라 왕생하고 이 땅이 정토가 되기를 희구하는 바람이 들어있다.


- 약사여래상은…

사진설명: 백률사 금동약사여래불.
약사여래는 약단지를 들고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 입상과 좌상이 약간 다르다. 입상은 7세기에는 약단지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가 8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주로 왼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좌상은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왼손에 약단지를 드는 경우와 오른손을 석가모니와 같이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왼손에 약 단지를 드는 경우가 있다.

손에 약단지… 입상.좌상따라 형식 달라

장곡사 금동여래좌상이 특히 유명하다.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협시로 봉안한다. 사방불(四方佛)이라 하여 사각형의 바위 각 면에 불상을 새겨 방위불을 상징하는 형식도 유행했다. 경주 굴불사지, 경주 남산 칠불암 사면불이 대표적인 예다.

작은 불상으로 조성하는 것은 선남선녀가 약사여래상을 조석으로 모시면서 꽃을 올리고 향을 사르면 장수하게 됨은 물론 부귀를 얻는다는 경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약사 여래를 모시는 전각을 약사전 또는 약광전(藥光殿)이라 한다. 강화군 전등사, 순천 송광사 등의 약사전이 특히 유명하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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