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미륵신앙 이란?

관리자 | 2006.06.09 10:56 | 조회 1493
미륵 신앙
미래부처님 기다리는 ‘희망의 신앙’
사진설명: 진표율사가 창건한 금산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륵도량이다. 왼쪽은 금산사 미륵전에 봉안된 미륵불.















불교에서 미륵신앙 만큼 사회적 국가적으로 영향을 끼친 신앙은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후삼국 시대 궁예를 비롯 스스로 미륵이라고 칭한 인물이 적지 않았으며, 조선시대에는 민란, 정감록, 갑오농민전쟁 등 역사적 사건마다 미륵은 스며들어 있다. 그 이유는 미륵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시아 즉 구세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빈곤에 허덕이면서도 신분제도로 인해 희망을 잃은 민초들이 새 세상을 열어준다는 미륵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봉건 사회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신생종교도 대부분 미륵을 표방했다. 하지만 통일신라 이후 정통 미륵사상을 표방하는 종파는 단 한차례 나오지 않았다.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은 ‘기다리는 미륵’이 아니라 ‘스스로가 미륵이 되는’ 것이다. 원효스님은 미륵정토에 왕생하는 인연은 과거에 지은 죄업을 참회하고 모은 죄업을 녹이는데 있다고 했다. 이처럼 구도를 강조하는 정통 미륵신앙은 거의 사라졌다.

미륵은 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라고 한다. 이 말은 자비.우정을 뜻한다. 미륵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7억 년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다.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에 근거했기 때문에 미륵보살을 한자로 자씨(慈氏)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륵보살은 인도의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천인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부처가 되기 이전의 단계이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부른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뒤 56억7천만 년이 지나면 사바세계인인 염부제로 내려와 화림원 안에 있는 용화수 아래에서 득도를 하여 미륵불이 될 것이다. 그 뒤 3회의 설법(龍華三會)을 거쳐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지 못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 그 때의 세계는 이상적인 국토로 변하여 땅은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이 뒤덮혀 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수명은 8만4천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도솔천 상생신앙과, 말세적인 세상을 구제하러 미륵이 하생하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앙으로 나뉜다. 미륵하생신앙은 말세사상과 구세주 개념이 합쳐져 사회혁명사상 역할을 했다. 미륵신앙은 이처럼 미륵을 구세주로 믿는 신앙,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사회사상, 개인의 구도 및 수행 3가지 면으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민간에서 믿는 미륵은 구세주 성격을 지닌다. 한국 역사상에서 보이는 미륵도 대개 이 범주에 들어간다.

“미륵정토에 나려면 십종행 닦아야”

그러나 미륵신앙의 본질은 미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륵이 되어서 자비를 행하는 데 있다. 원효대사는 〈미륵상생경 종요〉에서 미륵정토에 왕생하기위해서는 미륵을 염송하며 과거의 잘못을 참회해야한다고 했다. 미륵은 석가모니불보다 42겁이나 먼저 보리심을 발휘했으면서도 성불을 늦추는 것은 국토정토, 국토수호, 중생정화, 중생수호라는 본원력 때문이다. 이를 위해 미륵은 이타와 대비를 실현하며, 정법을 즐기고 타인에게 두루 이익됨을 발원하며, 탐진치 삼독심을 버리는 등 10종행(種行)을 수행한다. 미륵보살의 이 수행 때문에 중생은 보다 쉬운 행을 통하여 도솔천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백제시대 융성… 강력한 국가 건설 발원

핵심은 참회… 스스로 미륵되어 자비행



사진설명: 민중들 사이에 미륵불로 모셔진 도솔암 마애불.
중생들은 삼보공양, 불법봉행, 5계수지, 법당중수, 법문경청, 지계, 부처님 공양 등 16가지 인연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맺거나, 남을 위해 경율론 삼장을 연설해주고, 질투심을 버리고 타인에게 불법을 가르쳐 지니게 하고, 타인의 고통을 대신하며, 타인을 재난에서 구해주거나, 사람간의 불화를 중재하는 등의 이타행을 닦아도 용화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미륵정토 왕생의 핵심은 참회다. 즉 스스로의 수행으로 정토를 만드는 자력적 성격이 강한 것이 미륵신앙의 본질이다.

미륵신앙은 인도에서 성립된 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온 뒤 다시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미륵신앙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일본은 사회혁명사상이나 개인의 구도 수행과는 상관없이 쌀의 풍작과 관련한 보살로 신앙한다.

고구려 때부터 전래한 미륵신앙은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 통치 이념으로 작용했다. 이는 미륵사상의 3가지 측면 즉 우주적 이상인 미륵불, 정치적 이상인 전륜성왕, 이상사회의 현실적 구현인 용화세계를 적용한 것이다. 고구려는 아미타 신앙과 혼재된 미륵신앙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서는 ‘하생’신앙이 특히 성행

백제의 미륵신앙은 〈삼국유사〉에 나와있는 익산 미륵사 창건 설화에서 잘 드러난다. 무왕이 연못에서 미륵삼존상이 올라오는 장면을 보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이 설화는 미륵경전에 나오는 미륵불의 하생과 성도 그리고 삼회 설법을 통한 구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백제 무왕은 스스로를 미륵불 출현시의 전륜성왕인 상카왕에 대비시키고 백제부흥의 힘과 이상을 미륵하생신앙을 통해 현실화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백제는 미륵하생신앙이 강했다. 신라의 미륵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화랑이다. 신라의 화랑을 부르는 용화향도라는 말은 미륵신도라는 뜻이다. 화랑시절 삼국을 통일하는 염원을 세운 김유신 앞에 나타나 보검을 주었다는 도인 난승은 미륵의 사자(使者)다. 신라의 화랑은 미륵보살을 현실로 끌어내리면서 미륵보살이 갖고 있는 자기수행과 사회공동체를 위한 이타행을 통해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기위한 발원에서 생겨났다. 백제의 미륵신앙이 왕권이 중심이 되어 현실 국가를 통해 불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미륵하생신앙이었다면, 신라의 미륵신앙은 불교이념의 구현을 통해 현실 국가를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불교 유토피아를 지향하고자 하는 미륵상생신앙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도 미륵신앙은 계속되지만 삼국시대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지지는 않는다. 통일신라시대 가장 대표적인 미륵신앙이 진표율사의 점찰법회다. 진표율사는 미륵사상의 참회를 통해 불교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 속에는 백제부흥운동이 깔려있다. 진표율사의 미륵신앙은 삼국시대 국가차원에서 벌이던 것과 다르게 대중들 스스로에 의한 자각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진표율사 때부터 미륵신앙은 사회변혁사상으로 이용된다. 후백제 동학전쟁 등 미륵하생신앙이 이 지역에서 일어난 것도 진표율사의 미륵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진표율사가 창건한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중심이었다. 금산사는 지금도 한국을 대표하는 미륵도량으로 남아있다.

중국서는 포대, 한국서는 장승이 되기도

미륵신앙은 신라 후대에 들어서는 정토 계통인 아미타 신앙과 혼재되어 나타난다. 미륵불이 되는 노힐부득과 아미타불이 되는 달달박박이 함께 수도하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설화가 이를 말해준다. 하지만 미륵의 용화세계를 현실에 구현하겠다는 민중적 욕망은 통일신라 후대 사회혼란과 결부돼 민간에 더 퍼져나간다. 미륵을 자처하는 궁예의 출현으로까지 이어졌다. 고려 시대 들어서 미륵 신앙을 중요시하는 법상종이 선종이나 교종의 화엄종 세력에 밀려 나 실체가 거의 사라졌다. 일부 사찰을 중심으로 미륵 신앙은 왕실 및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다. 현종은 매년 미륵보살회와 아미타불회를 열었다. 특히 매년 4월 초파일부터 3일동안 개최되던 미륵보살회는 국가의 번영과 사직의 안녕을 축원했다. 민간에서도 미륵 신앙은 뿌리를 내렸다. 특히 미륵상은 민간에 스며들어 장승이 되었다.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하던 고려 후기 민간에는 미륵 신앙이 상당히 성행했다. 미륵불이 하생하여 교화하는 용화삼회에 참여하여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수 있기를 발원하며 향목을 해변에 묻어두는 매향 풍속이 유행했다. 이같은 미륵하생신앙은 고성 삼일포매향비와 경남 사천매향비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시대에도 여전히 하층민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은 이어졌다.

황석영의 대표적 소설 〈장길산〉의 모티브가 된, 숙종 14년에 일어난 승려 여환의 역모사건이 미륵불과 관련돼있다. 근대 이행기에 나타난 수많은 신생종교는 미륵 신앙을 그들의 교리속에 절충하여 만든 것이다. 주로 증산교와 용화교가 대표적인 예이다. 증산 강일순은 평소 제자들에게 금산사의 미륵불로 강림할 것이라고 말해 왔다고 한다. 서백일이 세운 용화교는 금산사를 본거지로 삼아 한 때 교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지금도 금산사 주변의 용화동을 중심으로 용화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미륵신앙이 사라진 것은 신라 후대에서 보이는 것처럼 내세와 관련된 것은 미타신앙에 흡수되고 뒤이어 미타신앙이 지장신앙에 흡수됐기 때문이다. 또 사회와 관련된 미륵하생 신앙은 신생종교나 다른 민간신앙에 흡수됐다.



-미륵삼부경은…

미륵신앙을 담고 있는 경전은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 〈불설관미륵보살하생도솔천경〉 〈불설미륵대성불경〉 세 경전을 말한다. 세 경전을 각각 〈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 〈미륵성불경〉이라고 한다. 이 중 〈미륵하생경〉과 〈미륵성불경〉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것으로 미래시제로 되어 있다. 이들 경전은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은 물론 십선행(十善行)을 실천하여 도솔천에 왕생하려는 도솔천 왕생사상과 지상불국토인 용화세계를 구현하려는 용화사상의 모태가 되었다.

미륵신앙 설파하는 세가지 경전

〈미륵상생경〉은 도솔천궁의 모습과 미륵보살의 탄생, 미륵보살에게 귀의하고 예배하는 공덕, 도솔천에 태어나기 위해 닦는 도솔천관 등이 담겨있다.〈미륵하생경〉은 미륵불 탄생 당시 사바세계의 생활상, 미륵불의 탄생 및 성도와 법회, 마하가섭이 미륵불에게 석가모니불의 법통을 전수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미륵성불경〉은 미륵보살과 양거왕.수닷타의 출가, 미륵불의 초전법륜, 미륵불의 신통력, 미륵불의 석가모니불 찬양, 가섭의 신통력과 설법 등을 담고 있다.


-중국의 미륵 포대화상

사진설명: 중국인들은 포대화상을 미륵불로 여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포대화상은 중국인들이 미륵불로 모신다. 중국에서는 포대화상이 도교사원에 많이 봉안돼 있다. 이는 미륵신앙이 중국에서는 도교와 융화 되었음을 말해주는 흔적이다.

도교와 융화… 너그러운 모습

포대화상은 당나라때 실존인물이다. 명주의 봉화현 사람으로 법명은 계차(契此)다. 뚱뚱한 몸집에 얼굴은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 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으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걸러메고 다닌다.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이라고 불렀다. 무엇이든 주는대로 받아먹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고 구름을 이불 삼고서 어느 곳에서든지 벌렁 누워 태평하게 코를 골며 이마을 저마을 돌아다니면서 세속사람들과 같이 차별없이 어울리면서 길을 가르치고 이끌었다.

“하나의 바릿대 천 집에 밥을 빌며 고고히 몸은 만리를 노닌다 알아보는 이 별로 없어라. 떠도는 흰 구름에게 길을 묻노라/미륵 참 미륵이여 천백 억의 몸으로 나투어 때때로 세속 사람들에게 보이나 세속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나에게 한 포대가 있으니 허공도 걸림이 없어라 열어 펴면 우주에 두루 하고 오므려 들일 때도 자재로움을 보노라”라는 게송을 남기고 앉은채로 입적했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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