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사리신앙 이란?

관리자 | 2006.06.09 10:54 | 조회 1343
사리신앙
인격적 부처님 못잊는 ‘그리움의 신앙’

사진설명: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 적멸보궁. 우리나라 사리신앙의 성지다.





















고승이 열반하면 세인들은 사리 수에 관심을 갖는다. 다비한 후 맑고 영롱한 사리는 고승의 생전 수행을 말해주는 스님의 분신으로 받아들여 신도들이 앞다퉈 친견한다. 사리 신앙은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부터 시작돼 일찍부터 여러 불보살 신앙과 함께 중요한 신앙으로 자리잡았다.

사리는 범어로 Sarira를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원래 죽은 사람의 시신, 또는 유골(遺骨)또는 정골(淨骨)이라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소리나는 대로 사리라(舍利羅)라고 하다가 사리(舍利)로 정해졌다. 사리는 육바라밀을 닦은 공덕으로 생기거나, 또 계정혜로 수행해서 생기는, 매우 얻기 어렵고 제일가는 복전이 된다고 한다.

사리는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화장하는 풍습을 지닌 인도에서 유래됐다. 인도에서는 고대부터 학문이나 덕이 높은 인물이 사망하면 그의 은혜나 덕을 기리기 위해 화장해서 그 뼈를 나눠 가졌다. 이들은 사리를 수행의 결정체로 보고 해탈과 열반을 성취한 증거로 믿었다.


탑은 사리 봉안위해 세운 신앙의 대상

육신 사라진 부처님에 숭배에서 출발



사진설명: 정암사 적멸보궁.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15리에 위치한 정암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한 곳으로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리는 형태에 따라 전신(全身) 사리와 쇄신(碎身)사리로 나눈다.

전신사리란 몸전체를 말한다. 몸 그대로의 미이라와 뼈를 섞은 흙상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유행경〉의 부처님 주검을 그대로 공양사리, 불사리라 하고 있는데서 나온 것이다.

쇄신사리는 다비한 뒤에 나온 구슬모양의 부서지지 않은 조각들을 말한다. 부처님을 비롯 현재 한국의 고승이 열반한 뒤 나온 사리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 쇄신사리는 북방불교 계통에서 발전했다.

전신사리와 쇄신사리를 몸에서 나온 생신(生身)사리라고 하며, 그 뒤 대승경전의 발달과 함께 부처님이 남긴 경전을 법신(法身)사리라고 해 부처님의 몸과 같이 여겼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인도와 멀리 떨어져 진신사리를 모실 수 없게 되자 부처님의 법을 모시는 것은 거의 일반화됐다. 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온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며 지금도 경전을 탑에 봉안한다. 경전 외에 금은보화 등으로 만든 사리소탑(舍利小塔) 불상, 옥장식(玉裝飾) 동경(銅鏡)장신구 같은 귀중품을 함께 넣기도 한다. 사리는 이처럼 단순한 유골이 아닌 믿음의 대상이 됐다. 부처님의 이빨 뼈 손톱 머리카락 까지도 사리로 모신다.

부처님이 다비 후 나온 사리는 불사리(佛舍利) 혹은 진신사리라고 해서 부처님처럼 여기고 경배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기원전 480년경 인도 쿠사나가라의 성 밖에서 열반에 든 뒤 7일 만에 재가신도들이 맡아 다비하자 8곡(斛) 4두(斗)나 되는 많은 사리가 출현하였다. 불사리를 얻기 위해 인도의 여러 왕들은 전쟁까지 불사했다. 말라족은 자기 영내에서 돌아가셨다는 점을 내세워 쿠시나가라에 탑을 세우려고 하자 각기 연고를 주장하는 주변 7부족이 사리를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선전포고를 했다. 결국 드로나 브라만의 중재로 진신사리는 여덟나라에 평화적으로 공평하게 분배했다.


불사리 신앙의 출발은 ‘근본팔탑’


분배된 사리는 탑을 만들어 봉안했다. 즉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건조물인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스투파(stupa)를 음역하여 솔도파(堵婆) 또는 팔리어 투파(thupa)를 음역하여 탑(塔婆)이 되었다. 이것이 불사리 신앙의 출발이며 탑의 시작인 근본팔탑(根本八塔)이다.

사리나 탑은 이처럼 육신이 사라진 부처님에 대한 숭배에서 출현했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에 대한 신앙은 상좌부에서부터 시작돼 대승불교의 〈법화경〉〈대반열반경〉에 이르러서는 부처님이 상주불변의 법신으로 불신관이 변하면서 불탑숭배 사상으로 변하였다.

불사리가 신앙으로 인식된 것은 서기전 3세기 중엽 아쇼카왕 때부터였다. 아쇼카왕은 8개의 사리탑 가운데 1개를 제외한 나머지 탑을 열어 전국에 사리를 나누어 봉안토록 하였다. 이 때 팔만사천의 불사리탑이 건립되었다. 이때부터 불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사리탑이 건립되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불교신앙이 이루어졌다. 이후 무수하게 불어난 불사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보물이 되어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중국.한국.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사리신앙이 매우 성행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수의 문제가 서기 7세기초 전국 110여 곳에 사리탑을 세우면서 본격화됐다. 당대에 들어서도 측천황후 등 황실의 발원으로 불사리 신앙이 성행하였으며, 수도인 장안의 여러 사찰에서는 불사리 공양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중국에서 선종이 나와 조사(祖師)를 불보살과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됐다. 이에 따라 선승이 열반하면 부처님처럼 다비한 후 쇄골사리를 탑에 모시게 됐는데 이를 부도라고 한다. 조사의 부도 역시 사리신앙의 연장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법승 삼보가 모두 사리신앙의 대상이 됐다.

진신사리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신라 진흥왕 때 각덕스님이 양나라의 사신과 함께 오면서 불사리를 모시고 와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흥륜사에서 맞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본격적인 것은 당에서 유학한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불정골(佛頂骨)과 치아사리(齒牙舍利)를 받아서 귀국하면서다.

자장은 왕에게 건의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오대산 중대에 사리를 안치하였고, 태백산 정암사.양산 통도사.설악산 봉정암.영월 사자사에 사리탑을 건립하였다. 이 다섯 곳의 사찰을 5대적멸보궁이라고 한다. 불사리 신앙은 신라가 곧 부처님의 나라라는 불국토 사상과 연관돼있다. 즉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신라가 본래 부처님의 나라라는 주장이 구체성을 갖게되는 것이다.

통일신라 하대에 들어서는 기복을 위한 석탑을 조성하는 것이 유행했다. 특히 이 때는 선종이 들어와 각 문파의 조사들의 사리로 승탑(僧塔) 즉 부도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에도 불사리 신앙은 유행하였다. 개성 인근의 개국사에는 사리를 보관하면서 계단을 설치하였고 스님 3천 2백여 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고려 왕들은 특히 불사리를 내전에 모셔 궁중에서 공양했다. 고려시대 왕들은 진신사리에 대한 신심이 돈독하여 사리신앙을 주도하였다. 고려시대 불사리 신앙은 진신사리를 친견함으로써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복적인 특성을 보였다.


자장율사 전래… 5대 적멸보궁 유명


조선시대 초기에는 사리신앙은 왕실을 중심으로 성행했다. 태조는 흥천사의 사리전을 위해 직접 터를 알아보고 건축과정을 시찰하고 독촉하여 낙성시키고 예배하였다. 이후 이 사리전은 기우제를 지내거나 법회를 열거나 중수하는 대상물이 되었는데, 신료들의 반대가 대단했다.

태종은 명 태조가 황엄을 보내 사리를 요구하자 전국에서 사리를 구한 결과, 충청도에서 45과, 경상도에서 164과, 전라도에서 155과, 강원도에서 90과를 모았으며 태조가 303과를 내놓았다고 한다. 사리신앙이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세종도 선왕들처럼 흥천사의 사리각을 수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불사리를 궁중에 모셔놓고 경배 드리기도 했지만 신료들의 반대에 못이겨 흥천사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세종은 스스로를 ‘보살계제자 조선국왕’(菩薩戒弟子 朝鮮國王)이라 칭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조선초기 왕실에 의한 사리신앙은 사회적 안정과 왕실의 번영을 이루어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통도사의 사리가 왜구들에 의해 도난당했다가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사명대사는 그 후 사리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태백산 정암사에 봉안하고 하나는 통도사의 계단을 중수하고 봉안했으며 정골치아사리는 건봉사에 12과를 봉안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1913년 스리랑카의 달마파라(達摩婆羅)가 지금의 서울 조계사에 진신사리를 기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동남아와 수교가 활발해지면서 남방불교권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사리탑을 세우는 예가 많다. 불탑 사리 신앙은 현재도 가장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특히 선승들이 열반한뒤 나오는 쇄골 사리에는 전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수행자의 표상으로 까지 삼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에 공양하고 그 공덕을 찬탄하는 법회를 사리회 혹은 사리강(舍利講)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활발하다. 특히 생전에 덕이 높은 고승일 수록 법회가 성황이다. 하지만 점차 부도가 화려해지고 사리가 본래의 뜻과 다르게 왜곡되면서 사리를 공개하지 않는 문중도 늘어나고 있다.



-출가교단의 입장

“출가자는 사리보다 법에 귀의”

사진설명: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방형사리합.
“부처님은 사리 불탑신앙과 관련하여 출가교단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동국대 불교학과 안양규 교수는 초기 불탑신앙과 관련하여 “팔리어 〈열반경〉에는 출가승려는 사리숭배 대신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도록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열반경〉의 붓다와 아난의 대화.

아난이, “우리가, 세존이시여! 여래의 시신(屍身)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여쭙자, 붓다는 대답했다. “아난아! 너희들은 여래의 사리숭배에 관해 염려해서는 안된다. 너희들은 참된 해탈을 향해 정진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사리숭배는 승려와 같은 진정한 수행자에게는 권장되지 않고, 다른 부류 즉 보통의 재가신자들에게 권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탑에는 어떤 경전을 봉안하나

법화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 모셔

사진설명: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법사리로 모시는 대표적인 경전은 〈금강반야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법화경〉 〈화엄경〉 〈연기법송〉(緣起法頌) 〈전신사리경〉(全身舍利經)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금강반야경’을 제외한 모든 경들에는 한결같이 사리를 안치한 탑을 공양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법화경〉 ‘법사품’에는 “여래의 탑에는 반드시 유골을 모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여래의 완전한 신체가 안치되어있기 때문이다”는 법사리에 대한 개념이 나온다.

사리구와 함께 탑 속에 작은 탑을 함께 봉안하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 99개 혹은 77개의 작은 탑을 만들어 그 하나하나에 다시 다라니를 넣어 탑에 봉안하는 행위는 곧 99억의 탑을 만드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로 탑속에 무구정광대다라니를 봉안했다.

고려시대 탑속에 많이 나오는 〈전신사리경〉은 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신앙의 근간이되는 경이다. 이 경을 쓰거나 탑, 불상 봉안하면 일체여래의 보호를 받고 그 불상, 탑이 모두 칠보로 되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도를 깨치며, 1번만 절하거나 1번만 돌아도 지옥에 떨어지는 이까지 해탈한다고 한다. 오대산 월정사 탑속에 이 경전이 들어있었다. 〈불설조탑공덕경〉에는 탑내에 여래의 사리 머리카락 치아 수염 손톱등을 안치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경전은 조선시대 탑속에 주로 보인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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