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역사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삼국시대의 불교

관리자 | 2006.03.14 05:05 | 조회 4911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두 조류, 즉 교학과 선종은 서로 양립 또는 융화되면서 한국불교의 축을 이루어 왔다. 먼저 불교가 유입되기 시작한 때부터 선종이 전래되기 전까지는 ‘교학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경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선종이 전래된 이후 천태종이 성립되기 전까지는 ‘교선 병립시대’라 하여, 양자가 나란히 발전하였다. 고려시대 천태종과 조계종이 성립된 이후로부터 고려 말기까지는 ‘선교 융섭시대’라 하며,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는 서산과 사명의 활약으로 ‘선교 겸학시대’가 열림으로써,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손꼽히는 ‘원융불이의 통불교’라는 회통불교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불교
고구려의 불상

1. 불교의 전래와 수용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후반에 중국을 통하여 불교를 받아들였고, 신라는 그보다 150년 정도 늦은 6세기 전반에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에서 불교 수용이 늦어진 이유는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고, 불교를 수용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늦게 정비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고구려의 불교
서기 372년, 소수림왕 2년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승려 순도(順道)를 고구려에 보내서 불상과 불경을 전해 주었는데, 이는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최초의 일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들어왔다. 이에 소수림왕 5년에는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건립하여, 순도와 아도가 머물게 하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였다.

그 당시 부견왕은 불교를 숭상하여 유명한 승려를 초빙하고 불경을 수집하는 데 열성이었다. 그가 고구려에 순도를 보내서 불교를 전한 것도 이러한 신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도 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해서 중국의 선진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접하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순도가 불교를 전해 주기 이전에 고구려 사회에서는 이미 불교를 알고 신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소수림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고구려 출신의 승려가 있었는데, 그가 당시 유명한 중국 강남지방의 승려 지둔(支遁, 314~366년)과 교류한 사실이 중국의 『고승전』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소수림왕대의 불교수용은 왕실에서의 공식적인 불교의 수용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전에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광개토왕대(391~412년) 초기에는 중국의 승려 담시(曇始)가 경과 율, 10여 부를 가지고 고구려에 와서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불교
백제의 불교 수용은 침류왕 때에 이루어졌다. 서기 384년, 침류왕 원년에 남중국의 동진(東晋)에서 서역 출신의 승려 마라난타(滅難陀)가 오자 국왕은 궁궐로 맞아들여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수도 근처의 한산(漢山)에 절을 건립하고 열 명을 출가시켜 거주하게 함으로써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였다.

역사 문헌에는 마라난타가 순도처럼 중국의 황제에 의해 파견된 것인지 아니면 개인 차원에서 백제에 온 것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동진에서도 전진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신앙이 활발하였고, 백제가 동진을 통하여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려고 노력했던 상황으로 보건대, 마라난타 역시 동진 황제에 의해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해동고승전』에서는 인도 출신인 마라난타가 교화를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다 중국을 거쳐 백제에 왔다는 고기(古記)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백제의 경우에도 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활발하였기 때문에 침류왕 때 불교의 공식적 수용 이전에 이미 민간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신라의 불교
신라에는 5세기 초부터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고구려나 백제처럼 쉽게 수용되지 못하다가, 6세기 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전래설화가 몇 가지 전해 오고 있다.
1) 위(魏, 220~265년)나라의 굴마(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高道寧)과 관계하여 아도를 낳았다. 아도는 다섯 살에 머리를 깎고 열여섯 살에 위나라로 가서 현창(玄彰) 화상에게 배운 후 열아홉 살에 귀국하였다. 고도령은 아도에게 3천여 달이 지나면 신라에 불법을 보호하는 왕이 나와서 불사를 크게 일으키게 되며, 신라의 수도에 일곱 곳의 가람 터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신라에 가서 불법을 전하라고 하였다. 미추왕 2년(263), 아도가 신라에 도착하여 궁궐로 들어가서 불교를 믿을 것을 청하자 사람들은 처음 보는 것이라고 꺼리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아도는 속촌(續村, 현재 경북 선산지역)의 모록(毛祿)의 집에 숨어서 3년을 보냈다. 그 때 공주가 병이 났는데, 아도가 치료해 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경림(天鏡林)에 가람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미추왕이 세상을 떠난 뒤 불교를 없애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속촌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입적하였다.
2) 눌지왕(417~457년)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 현재 경북 선산지역)으로 와서 모례(毛禮)의 집 뒤쪽 굴 속에 머물렀다. 그 때 양(梁, 502~557년)나라에서 향을 보내 왔지만 신라의 왕과 신하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자 묵호자가 그 이름과 사용법을 알려 주고, 그 향으로 삼보(三寶)에 기원하여 공주의 병을 낫게 하였다. 그 후에 묵호자는 행방을 감추었다.
3) 비처왕(479~499년, 소지왕이라고도 함) 때 아도(阿道)가 시자 세 명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여러 해 동안 머물다가 아무런 병 없이 죽었는데, 그 시자들이 남아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니 종종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4) 법흥왕 14년(527년)에 아도가 일선군 모례의 집에 이르니 모례가 놀라서 고구려에서 온 승려 정방(正方)과 멸구자(滅垢疵)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밀실에 숨어 있게 했다. 그 때 오(吳)나라에서 향을 보내 왔지만 왕이 그 사용법을 몰라서 아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자 아도가 불에 태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중에 아도가 신라의 서울로 왔을 때 중국의 사신이 그에게 예배하는 것을 보고서, 법흥왕이 불교를 믿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와 같이 전설적 성격이 강한 이 전래설화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여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내용들은 신라에 처음 불교가 수용되는 모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처음 신라에 불교를 전해 준 것은 고구려에서 온 승려들이었으며, 그들은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였던 경북 선산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불교를 전파하였다. 이후 불교에 대한 소문이 신라의 수도에도 알려져서 왕실의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불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부 승려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실제로 신라에 불교가 수용되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불교 수용 시기를 고려해 볼 때, 1)과 같이 미추왕 때에 불교가 소개되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며, 대체로 2)에서 이야기하는 눌지왕 때를 전후한 시기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본다.

신라에서 공식적으로 불교가 수용된 것은 법흥왕 15년(528)으로, 이 때 신라 최초의 가람인 흥륜사(興輪寺)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가야의 불교
가야에도 불교가 전해졌지만 전래된 시기와 그 경로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에서는 가야 건국 직후에 인도 출신인 수로왕의 부인 허 왕후와 함께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현재 수로왕릉의 앞에 놓여 있는 파사석탑이 그 때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파사석탑은 재질이나 형태면에서도 한국의 다른 탑과는 구별되는데, 인도와 동남아시아지역의 불교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가야의 불교가 삼국과 달리 중국이 아닌 남방불교를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파사석탑이 만들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가야불교에 대한 자료들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데는 어려운 점이 많다.

최근에 그 동안 미진했던 동남아시아지역과의 문화교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앞으로 가야불교에 대한 이해 또한 보다 더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수용과 갈등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별다른 갈등이 없었던 반면에, 신라에서는 이차돈의 순교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불교 수용을 추진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이른 시기에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정비했던 것과 달리, 신라는 6세기 초까지도 왕권이 확립되지 못한 연맹체적인 정치체제를 탈피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와 백제는 일찍이 율령을 반포하고 국왕을 보좌하는 관료체제를 갖추었으므로 국왕이 불교를 수용하려는 정책을 취했을 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를 시행할 수 있었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국왕의 불교 수용 의지에도 불구하고 귀족 세력들이 이에 반대하여 불교 수용 정책이 쉽게 추진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은 귀족세력에 대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하려는 정책들과 동시에 추진되었다.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때 율령이 반포되었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는 등 관료체제의 기본 골격이 갖춰졌다. 또한 귀족의 대표로서 상대등(上大等)을 두고 왕은 귀족들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불교의 공인은 이처럼 왕의 권한이 강화된 시점에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 삼국의 국왕들이 불교를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은 불교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국가의 통치체제에 부응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대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의 부족연맹체 단계에서는 각 부족들은 각기 독자적인 전통과 신앙을 가지고서 독립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부족적 자율성을 해체하고 전체 사회 구성원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보다 강하게 결합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각 부족마다의 독자적인 전통이나 신앙을 모든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전통과 신앙으로 대체해야 했는데, 불교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전통과 신앙에 적합한 사상체계였던 것이다.

불교는 본래 고대인도에서 부족적 전통과 신앙을 부정하고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을 추구했기 때문에, 한국의 고대국가 형성에도 중요한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또한 같은 이유 때문에 종래 각 부족의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부족적 전통을 유지하기 원하던 귀족들은 불교의 수용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불교의 수용에 의해 자신들의 부족적 전통이 갖는 사회적 비중이 축소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차돈의 순교사건은 왕과 귀족 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받들고자 하였지만 종래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귀족들의 반대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왕의 측근이었던 이차돈이 자신을 희생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고, 귀족들의 반대를 꺾고 불교를 받들게 했던 것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일어난 여러 이변들은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될 것이지만, 이차돈의 순교 이후 귀족들이 불교 수용에 반대하지 못한 것은 이변에 대한 놀라움 때문만이 아니라 이차돈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왕의 강력한 권한행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왕은 자신들과 대등한 귀족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신민(臣民)들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불교 수용과 비슷한 상황이 일본에서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했다. 신라에서는 이차돈 한 사람의 순교로 마무리된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왕실과 귀족 사이의 대대적인 투쟁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불교에 대한 수용이 인정될 수 있었다. 이는 두 나라의 고대국가 체제의 진전 정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에서 별다른 마찰 없이 불교가 수용된 것은 4세기 전반에 이미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해 놓았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2. 불교적 정치이념
전륜성왕
불교가 수용된 이후 삼국에서는 고대국가의 통치체제, 특히 국왕의 존엄성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불교의 사상이나 이론을 정치이념으로 이용하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불교의 수용과 고대국가 체제의 정비가 함께 이뤄진 신라사회에서 두드러지지만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불교를 이용하여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모습들이 일부 보이고 있다.

불교의 정치이론을 현실의 정치이념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예로서 전륜성왕의 이념을 들 수 있다.

전륜성왕은 본래 인도의 이상적이며 신화적인 군주로서, 그 통치방식에 따라서 금륜(金輪)과 은륜(銀輪), 동륜(銅輪), 철륜(鐵輪) 등으로 구분되며 이들이 지상에 출현하면 분열된 나라들이 하나로 통합되고 평화로운 세계가 건설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입멸한 후에 북인도에서 아쇼카 왕이 출현하여 분열된 나라들을 통합한 후에 덕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자 그를 가리켜서 전륜성왕 중의 철륜성왕에 해당한다고 하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도덕과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한 아쇼카 왕이 불교의 가르침에 공감하여 불교교단을 보호하고 주변지역에 불교의 포교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그를 모델로 하여 불교적 전륜성왕의 이상형을 만들어 냈다.

『아육왕경』 등의 경전에 묘사된 불교의 전륜성왕은 불법에 의거하여 세상을 통합하고,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며 불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널리 불법을 전하고, 노년에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였다. 또한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내세불인 미륵이 지상에서 성불하여 중생들을 구원한다고 이야기되었다.

신라 법흥왕을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진흥왕은 이와 같은 전륜성왕의 이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군주였다. 아들의 이름을 전륜성왕의 이름을 딴 동륜과 금륜이라고 하였고, 그가 창건한 황룡사의 장륙불상은 원래 인도의 아쇼카 왕이 불상을 만들기 위하여 발원한 철과 금을 사용하여 주조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진흥왕이 이처럼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적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 유역과 함경도지역까지 영역을 넓혀 가던 그의 팽창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정책을 단순한 정복전쟁이 아니라 분열을 통합하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세우고, 이 점을 불경에 묘사된 아쇼카 왕의 통치와 동일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자신이 정복전쟁을 일단락 지은 후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순행하면서 도덕에 의한 통치로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며 새로 편입된 지역의 백성들도 차별 없이 대할 것을 선언한 순수비를 세웠다. 이것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아쇼카 왕이 새로 개척한 지역에 건립한 아쇼카 법칙(法勅)의 돌기둥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진흥왕은 넓은 영토를 개척하고 안정된 통치기반을 확립하였으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신앙하였다는 점에서 불경에 나타난 전륜성왕에 부합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륜성왕 이념은 신라의 진흥왕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하였던 백제의 성왕에 의해서도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왕이라는 왕호 자체가 전륜성왕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불교를 장려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다는 점에서 전륜성왕과 비슷한 점이 있다.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위축되어 있던 국가체제를 재정비하여 백제의 부흥을 도모하고자 한 성왕에게 전륜성왕은 매우 이상적인 모델로 비쳐졌을 것이다.

진종(眞種)의식
전륜성왕 이념과 함께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용된 정치이론 중에 신라 왕실의 진종의식이 있다.

진종이란 말은 불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의 의미는 인도의 네 계급 중 크샤트리야 계급을 뜻한다. 크샤트리야를 한문으로 옮길 때에 발음을 따서 찰제리종(刹帝利種)이라고 하거나 참된 종족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진종(眞種)이라고 번역했으며, 여기에서의 종(種)은 신분이 아니라 혈족으로 이해되었다.

신라의 왕실은 이러한 한문 번역어에 기초하여서 진종을 부처님이 속했던 석가족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들도 진종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경전에 묘사된 석가족의 신성함을 이용하여 왕실이 자신들의 혈통을 일반 백성들과 구별되는 신성한 혈통으로 내세우려 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진종의식은 신라의 국가적 신성함을 보장해 주는 논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진흥왕 이후 진덕여왕에 이르는 왕실에서 진(眞)이라는 글자를 붙인 왕호를 빈번하게 사용한 것도 이러한 진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왕실을 진골(眞骨)이라고 하여 두품(頭品)을 갖는 일반인들과 구분하는 의식도 이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 역시 진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신라 왕실의 진종의식은 불교에 대한 신앙을 더욱 심화, 발전시켰다. 자신들을 석가족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부처님의 가족과 동일시하고 나중에는 국왕을 부처와 같은 존재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진평왕릉

예컨대 진평왕의 이름은 경전에 부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오는 백정(白淨)이었으며, 진평왕의 형제들 이름도 부처님의 삼촌들 이름을 따서 백반(伯飯), 국반(國飯) 등이었다. 또한 왕비 이름 역시 부처님의 어머니의 이름인 마야(摩耶) 부인으로 불렸다. 이러한 이름들은 국왕 일가가 자신들을 부처님의 가족과 동일시하기 위하여 붙인 것으로, 이러한 가족에게서 부처님과 같은 국왕이 태어나기를 기대하였다고 생각된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딸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녀의 왕호인 선덕여왕은 경전에 나오는 동방세계의 부처의 이름인 선덕여래(善德如來)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또한 선덕여왕의 사촌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曼)은 『승만경』의 주인공으로서 장래에 부처가 될 것을 약속받은 승만 부인의 이름에서 딴 것이었다.

이처럼 왕실 중에서도 특별히 국왕의 가족들을 진골 왕실과 구분할 필요성이 생겨났는데, 성골(聖骨)로 불리는 집단이 바로 이러한 제한된 국왕의 가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덕여왕 이후 성골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처럼 국왕의 가족을 부처님의 가족과 동일시하였던 진평왕의 가계가 끊긴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왕실에서는 불교의 사상이나 이론을 이용하여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는데, 이는 역대 국왕의 왕호나 이름을 불교식으로 한 것에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라의 경우 법흥왕은 ‘불법을 일으킨 왕’을 뜻하고, 진흥왕은 ‘진실로 불법을 일으킨 왕’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들은 말년에 왕위를 내 놓고 출가하여 각기 법공(法空)과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가지기도 하였다.

특히 법흥왕에서부터 진덕여왕에 이르는 시기의 국왕들은 모두 불교와 관련되는 왕호나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이 시기를 ‘불교식 왕명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라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불교적인 국왕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백제의 경우 성왕에서 법왕까지의 국왕들의 왕호가 불교적이다. 성왕은 전륜성왕의 약칭이며, 위덕왕은 불경에 보이는 위덕불(威德佛)에서 딴 것이고, 혜왕(惠王)과 법왕(法王)은 불교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신라의 ‘불교식 왕명시대’와 겹치는 시기로 비슷한 때에 백제와 신라가 국왕에게 불교적인 이름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국왕의 왕호나 이름을 불교적으로 붙인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죽은 국왕을 추모하여 만든 탑에서 발견된 금동판에서 국왕을 원각(圓覺)대왕이라는 불교용어를 사용한 모습이 보인다.

3. 불교교학의 수용
고구려의 불교학
이른 시기에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고 중국의 왕조와 교류하였던 고구려는 불교학의 연구에서도 선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하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 출신의 승려가 남중국의 고승 지둔과 교류한 것은 이미 당시에 불교학의 이해 수준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고구려 불교학의 내용을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고구려 국내에서 활동한 승려들에 관한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주로 외국의 불교계에서 활동한 승려들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 불교학의 내용을 엿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초기 불교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중국에서 삼론학(三論學)을 집대성한 승랑(僧朗)이다. 5세기 후반에 중국으로 유학한 그는 처음 북중국에서 삼론학을 공부하였고, 얼마 후 강남지방으로 옮겨 섭산(攝山)의 서하사(棲霞寺)에 머물며 삼론학을 강의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구마라집이 전한 대승중관사상의 삼론학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여 쇠퇴하고 있었고 대신 소승적 교학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비달마 교학과 성실학(成實學)이 각기 화북지방과 강남지방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승랑은 삼론학의 이론을 깊이 연구하여 재정비함으로써 중국에서 중관사상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승랑의 삼론학은 이후 문도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수(隋)나라 때에는 천태학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수나라 때 삼론학을 집대성한 길장(吉藏, 549~623년)은 승랑에 의해 중국의 삼론학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고 평가하였으며, 스스로 그의 사상을 계승한 것을 자부하였다. 승랑은 고구려로 귀국하지는 않았지만 승랑에 의해 발전하게 된 삼론학은 이후 고구려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수나라 초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고구려의 인(印) 법사, 실(實) 법사 등이 삼론학을 강의했던 것으로 전하며, 유학한 승려들뿐 아니라 고구려 국내에서도 삼론학이 발전했다는 것은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의 승려들이 대부분 삼론학을 공부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595년에 일본에 들어간 혜자(慧慈)는 삼론학의 대가로서 성실학에도 밝았다고 하며, 620년대에 일본에 건너간 혜관(慧灌)과 도등(道登)도 모두 삼론학의 대가였다고 한다. 특히 일본의 제2대 승정(僧正)이 된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삼론학 외에도 여러 교학을 배운 고구려 승려들의 이름이 전한다. 6세기 말에 중국 강남지방에서 활약했던 지황(智晃)은 설일체유부의 교리에 밝았다고 하며, 천태산에서 지자(智者)로부터 직접 천태학을 배운 파약(波若, 562~613년)을 비롯하여, 열반학의 대가로 꼽혔던 보덕(普德) 등이 고구려 출신 승려였다.

고구려 내부의 불교학 연구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고구려 초기 수도인 환도성에서는 불교학 연구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원광(圓光)의 제자 원안(圓安)은 중국에 유학하기 전에 이 곳에 유학하여 불교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불교학
고구려와 비슷한 시기에 불교를 공인한 백제에서도 불교학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실제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특히 6세기 이전에 활약한 승려와 그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주로 성왕대 이후의 자료가 전하고 있다.

성왕 19년(541)에 남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열반경 등의 경전에 관한 해설서를 구하였다. 당시 양나라에서는 열반경, 법화경, 유마경 등의 대승 경전이 널리 연구되고 있었고, 특히 열반경에 대해서는 여러 주석들을 모은 『열반경집해(涅槃經集解)』가 총 71권(509년 완성)으로 편찬되어 있었다.

중국에 유학한 백제 출신 승려로는 6세기 초반에 양나라에 유학한 발정(發正)과 6세기 후반 진나라에 유학한 현광(玄光)이 알려져 있다.

백제에서 활동한 승려로는 법화경 수행자로 유명한 혜현(慧顯)이 있다. 그는 수도 북쪽의 수덕사와 남쪽지방의 달나산(월출산)에서 법화경 독송의 수행을 실천하다 입적하였다. 전기에 의하면, 법화경을 독송한 공덕으로 사후에 시신이 모두 없어진 뒤에도 혀만은 오랜 기간 변함없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6세기 말 이후 일본에 건너가 쇼오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던 혜총(慧聰)과 관륵(觀勒)도 삼론학의 학자로 유명하였다. 이 시기의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삼론학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서는 계율도 중시하였는데 584년에는 일본의 비구니들이 정식으로 계를 받기 위하여 백제로 유학을 왔으며, 관륵은 일본에서 승단의 계율을 강조하여 초대 승정에 임명되었다. 백제의 계율학과 관련해서는 성왕대에 겸익(謙益)이 인도에 유학하여 부파불교의 율장을 가지고 귀국하여 번역하였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미륵불광사사적기」에 의하면 겸익은 526년에 바닷길을 통해 중인도로 들어가 그 곳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에서 5년 동안 불교학을 배운 후 율장의 범어 원본을 가지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겸익은 함께 온 인도 승려와 협력하여 범어 율장을 한문으로 번역하였고, 백제 승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그 내용을 해설하는 36권의 율소(律疏)를 지었다고 한다.

중국 이외 지역의 승려가 직접 인도에 유학하고 돌아와 독자적으로 율장을 번역하였다는 것은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획기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겸익이나 그가 번역한 율장에 관한 내용은 다른 자료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유일한 자료인 「미륵불광사사적기」의 출처도 아직 분명하지 않다. 겸익의 행적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신라의 불교학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불교의 수용이 늦었지만 불교학의 전개에 관한 자료는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불교가 수용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양나라에 유학하였던 각덕(覺德)은 진흥왕 10년(549)에 양나라 사신과 함께 귀국하면서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왔고, 진나라에 유학하였던 명관(明觀)은 진흥왕 26년(565)에 귀국하면서 불경 1,700여 권을 가지고 왔다. 또한 17년 동안 진나라에서 공부하고 진평왕 24년(602)에 귀국한 지명(智明)은 승려들에 대한 수계 의식을 설명하는 저술을 지었다.

부처님의 사리와 경전이 전해지고, 승려들의 출가 수계에 대한 의식이 정리됨으로써, 비로소 불레熏승 삼보를 갖추게 된 신라의 불교학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라 불교학의 선구자는 진평왕 때 활약한 원광(圓光, ?~630년)이었다. 6세기 후반에 남중국의 진나라에 유학한 원광은 원래는 유교를 공부하려 하였지만 우연히 사찰에서 설법을 들은 후 곧바로 출가하여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당시 진나라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던 성실론과 열반경, 반야경, 아비다르마 등을 연마하여 성실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옮겨 당시 새롭게 대두되고 있던 섭론학(攝論學)을 연마한 후 진평왕 22년(600)에 신라로 돌아왔다.

원광은 귀국 후 처음에는 청도의 운문산 가서사(嘉栖寺)에 머물면서 점찰법을 통해 대중들을 교화하였다. 점찰법은 청정한 마음으로 간자(簡子, 나무막대)를 굴려서 자신의 전생의 업보를 점친 후, 그 결과에 따라 참회 수행을 하고 선행을 닦으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가서사를 중심으로 한 원광의 교화가 유명해지자 왕실에서는 그를 중앙으로 초청하여 정치적 자문을 구하고 수나라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는 외교 문서의 작성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출가하기 전 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러한 왕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면서 출가자로서의 윤리와 세속인으로서의 윤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가서사에 머물 때에 가르침을 구하러 찾아온 귀산과 추항 등의 청년들에게 보살계 대신 속세의 사람들이 지킬 계율로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시한 것도 이러한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원광 이후 신라 불교학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자장(慈藏)이었다. 자장은 진골 출신으로 전기에 의하면 아들이 없던 그의 아버지가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여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출가를 결심하여 고골관(枯骨觀)을 닦았고 출가자가 되기 위하여 재상의 자리도 거절했다고 한다. 선덕여왕 5년(638)에 사신을 따라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유학한 그는 계율학과 섭론학 등을 수학하고 선덕여왕 10년(643)에 대장경 1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자장은 귀국 후에 왕실과 황룡사에서 섭론과 보살계를 강의하였고 왕실의 후원 아래 대국통(大國統)에 취임하여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 유학을 통해 계율에 정통하게 된 그는 승려들에 대한 계율의 교육과 감찰을 강화하여 승려들의 생활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였으며, 왕을 비롯한 재가 신자들에게도 보살계를 베풀었다. 이처럼 계행을 고취시켜 불교교단의 위상을 높인 행적으로 그는 호법(護法)보살로 불리게 되었다.

자장은 또한 황룡사 탑를 비롯하여 각지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여 사리신앙을 유포하였고, 아미타신앙에도 관심을 가져서 『아미타경소』와 『아미타경의기』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4. 미륵신앙과 불국토 사상
미륵신앙
불교가 정착되면서 부처와 보살들에 대한 신앙도 널리 퍼졌다. 삼국시대에는 특히 미륵에 대한 신앙이 활발했다. 미륵에 대한 신앙은 죽은 후에 현재 미륵이 수행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의 설법을 듣기를 원하는 상생신앙과 내세불이 이 지상에 출현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해 주기를 기원하는 하생신앙이 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자료에는 주로 하생신앙이 나타나며, 상생신앙은 이른 시기의 사례가 일부 보일 뿐이다.

상생신앙의 사례는 주로 고구려에서 보이고 있는데 6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영강7년명불상광배(평양 발견)」와 「병인년명금동판(함남 신포시 발견)」 등에 죽은 사람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을 만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리고 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만주(滿洲) 집안(輯安)지역에 있는 장천 1호분의 전실 벽화 중에 무덤의 주인공 부부가 도솔천에 왕생하여 미륵에게 예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에서 미륵 상생신앙의 사례가 발견되는 것은 고구려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던 북위에서 도솔천 왕생신앙이 성행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래 천제의 자손으로 자처하던 고구려의 왕실과 귀족들은 원래 사후에 천상으로 올라가 조상들을 만난다는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즐거움이 가득한 하늘나라인 도솔천에 올라간다는 상생신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6세기 후반 이후에는 고구려에서도 상생신앙의 사례가 발견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불상들에는 도솔천에의 왕생을 대신하여 항상 부처님을 만나서 가르침을 듣게 될 것을 기원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도솔천에 왕생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보다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생신앙은 백제와 신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백제의 무왕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익산의 미륵사는 미륵이 지상에 출현하여 세 차례 설법함으로써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을 상징하는 3금당 3탑의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신라에서는 경주 근처의 단석산 꼭대기에 8미터 크기의 대형 미륵 3존상을 새기고 미륵이 지상에 출현하기를 기원하였다.

백제와 신라에 미륵 하생신앙이 성행한 배경에는 두 나라의 불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중국 남조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미륵 하생신앙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와 함께 백제와 신라에서 전륜성왕의 이념이 강조되던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불경에서는 미륵이 출현하여 용화 회상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전륜성왕이 나타나서 세상의 혼란을 극복하고 지상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여 전륜성왕과 미륵의 지상출현을 긴밀하게 연결짓고 있기 때문에 왕실이 전륜성왕의 이념을 고취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미륵의 하생에 대한 기대가 커져갔을 것이다.

실제로 미륵 하생신앙과 전륜성왕의 이념에 관한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신라의 경우 미륵 하생신앙은 진흥왕의 아들로서 금륜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진지왕 때에 처음 보이고 있고, 신라사회에서 미륵의 화신으로 이야기된 화랑제도 역시 진흥왕 때에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본래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대외적인 팽창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용되었던 전륜성왕 이념은 불교의 틀 안에서 제시된 것이었으므로 전륜성왕의 노력이 불교적 이상세계인 미륵의 용화 회상을 건립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백성들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백제와 신라의 미륵 하생신앙은 57억 6천만 년 이후의 먼 미래에 미륵이 출현한다고 하는 본래의 미륵 하생신앙과 달리, 현실에서 곧바로 미륵의 용화회상이 구현되기를 기대하는 실천적 성격이 강했다.

한편 삼국시대 후기에 신라에서 다수 제작된 반가사유상들은 이러한 미륵 하생신앙을 상징하는 불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도솔천에서 지상에 내려와 성불을 준비하고 있는 미륵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전륜성왕의 지도 아래 곧 용화회상으로 변할 신라사회의 이상을 상징한 불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의 경우 미륵 이외의 다른 보살들 중에도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된 사례가 있고, 신라의 반가사유상들에 미륵상이라는 명문이 발견되고 있지 않으므로 그렇게 단정하기 힘들다는 반론도 있다.

반가사유상은 본래 출가하기 이전 석가의 사유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데서 비롯되어 사회와 시대에 따라서 각기 다른 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신라의 경우에는 현존하는 반가사유상 중에 하생한 미륵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사례들이 있고, 또한 반가사유상이 성행한 시기가 전륜성왕의 이념과 미륵 하생신앙이 유포되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으므로 반가사유상을 이 시기의 미륵 하생신앙을 상징하는 불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국토 사상
불교가 정착되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국토가 오랜 과거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현재도 불교의 호법신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는 불국토 사상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불국토 사상은 특히 불교의 수용과 국가체제의 정비를 동시에 이루었던 신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는 국가의 정통성을 불교적으로 수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현재의 국토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유연(有緣) 국토 관념의 예로서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먼 옛날 과거 부처의 시대에 사찰이 있었던 일곱 곳의 가람 터가 있다는 이야기와 황룡사의 뒤쪽에 있는 큰 돌이 과거 부처인 가섭불이 앉아 있던 연좌석(宴坐石)이라는 이야기 등이 있다.

이러한 관념은 이 세계는 수많은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여 왔으며 그 때마다 부처가 출현하여 중생들을 구제하였다는 불교의 세계관에 의거하고 있는 것으로, 신라는 현생에서의 불교 수용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주 먼 과거에 불교의 인연이 있는 불교의 중심국가라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신라가 불법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관념과 관련된 것으로는 신라의 국왕이 전생에 도리천 천자의 자식으로 하늘의 천중들이 보호하고 있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주변의 나라들이 모두 복속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중국에 유학하였던 승려들을 통하여 제시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안홍이 저술했다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들어 있었다고 하며, 선덕여왕대에 활동한 자장 역시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에서 불교 신앙을 통하여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려 했던 수나라 문제의 정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불법의 가호로 나라를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대형 탑들을 건축하여 숭불의 황제로 유명했는데, 그로 인해 후대에는 문제가 도리천의 보호로 남북조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인식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 당시 신라는 삼국의 항쟁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으므로, 이러한 문제의 숭불정책을 본보기로 삼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던 과정에서 신라도 불법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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