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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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불교

관리자 | 2006.03.14 05:05 | 조회 4549
현대 중국의 불교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중국에서는 두 가지의 억압적인 세력에 대한 대응으로서 민족의 갱신을 위한 전반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쇠락한 불교교단을 부흥하려는 현대의 시도는 그러한 전반적인 운동의 일부였다. 두 가지 억압적 세력이란, 중국 봉건사회의 전반적 퇴조와 서양의 충격이었다.

불교교단을 부흥하려는 시도는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발생했다. 불교의 복고주의자들은 일본, 인도, 동남아시아의 불교국, 심지어는 서양의 불교단체들과도 접촉을 가졌다. 그들 중의 일부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상좌부(上座部)의 전승인 팔리어 경전을 연구했고, 산스크리트 문헌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불교 부흥의 시도는 서양의 지배가 낳은 한 가지 양상, 즉 기독교의 충격에 대한 반동으로서 제기되었다. 잘 조직된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회가 중국에 등장한 데서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양측의 선교회의 영향을 받아 그들과 유사한 제도와 전교 방법을 스스로 조직하고 개발하기 시작했다.

불교의 부흥에 앞장서 나아간 이들은 교양 있는 재가 신도들이었다. 이들은 현대의 인쇄기술을 이용하여 불교의 경전과 논서들을 발행하는 운동을 착수하였고, 불교연구회를 설립하여 교단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불교계에 불리했다. 말기의 청나라 정부가 그랬듯이 초기의 공화국 정부도 승단을 다루기 쉬운 표적이라 간주하여, 주저하지 않고 불교의 시설들을 몰수하여 학교를 짓거나, 사원의 부동산을 전유하여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보충하였다.

정부의 정책과 기독교의 선교회가 결부된 압박에 보다 효과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민족적 규모로 교단을 재정비하려는 다양한 시도는 1929년에 전국적인 중국불교회의 설립을 이끌어 냈다. 이 단체를 설립한 부흥운동의 지도자는 태허(太虛, 1899~1947년)와 원영(圓瑛, 1878~1953년)이었다. 태허는 진보적인 진영을 대표했고, 원영은 보수적인 진영을 대표했다.
태허스님(太虛, 1899~1947년)
그 후 몇십 년 동안 이 불교회가 진행한 수많은 활동으로 불교학이 부흥했고, 불교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었다. 특히 불교학은 천태종이나 화엄종, 유식학 등과 같은 과거의 전통적인 중국학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진정한 대규모의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민족주의, 대대적인 현대화, 맑스 레닌주의와 같은 세속적 이념의 위력에 지배된 중국의 일반적인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는 종교적 행동주의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불교를 부흥시키려는 시도는 승려와 교양 있는 재가 신도가 주축을 이루는 소규모의 지식층에 국한된 상태였을 뿐, 교단의 압도적인 다수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더욱이 새로운 불교조직들은 대개가 세련되지 못한 지도력과 개인적인 반목, 기금의 부족에 시달렸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불교기구들이 밀착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 시도에 결정적으로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왜냐하면 일본 정부가 정치적 침투와 일본의 신장을 위해 의식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그 갈등은 악화되었다. 새로운 정권은 초기에는 직접적인 억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과거의 봉건제도가 남긴 다른 찌꺼기의 현상처럼 불교도 저절로 사멸할 것이라고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혁명 기간에는 승단에 대한 과격한 행위와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파괴가 정치적 대중운동으로 자행되었다. 그리고 1959년에 있었던 티베트의 폭동 때에도 라마교에 대한 극심한 탄압 조치가 있었다.

그 후로 불교교단에는 새로 입문하는 승려가 거의 없게 되었고, 기존의 승려마저 환속함으로써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1950년대 초기 이래로 불교교단의 경제적 기반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사원의 토지는 몰수되어 재분배되었고, 역사적 기념물로서 최소한으로 보전되고 있는 소수의 고대사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불교시설들은 전적으로 신도의 보시에 의존하여 명맥을 잇고 있었다.

1949년 이후 정책적으로 설립된 중국불교협회는 종교정책을 이행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또 해외의 불교단체와 공식적인 접촉을 맺는 대표적인 인민조직으로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다만, 1976년 이후부터 중국에 불고 있는 자유화의 기류에 따라 불교계에도 부흥의 바람이 불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조직화되어 교단으로서 정립될지는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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