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부처님은 왜 출가하셨습니까?

관리자 | 2007.07.10 01:08 | 조회 1179

      부처님은 왜 출가하셨습니까? 약육강식의 모순과 생로병사의 고통을 보고 의지 없는 자에 게 의지처가 되고 집 없는 자에게 집이 되기 위해서 출가 하였다. 석존의 탄생과 일생에 관해서 우리는 비교적 신빙할 수 있 는 많은 역사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절대적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신비화시킨 흔적도 엿보이지만 신화는 하나의 상징이므로, 그 상징을 통해 역사적 인물이었던 석존의 일생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석존의 생애를 알려 주는 직접적인 문헌자료로는 아함부 계통의 여러 경전 중 특히 [불소행찬], [석가보], [상응부 경전] 등이 있습니다. 또 석존의 일생을 증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룸비니(네팔의 다라니지방)에는 기원전 250년 경에 아쇼카왕이[여기서 붓다 석가모니가 탄생하다.]라고, 새겨 서 세운 돌기둥이 남아있습니다. 석가족은 사성계급 중의 크샤트리아(무사계급)로서 농업 을 생업으로 하는 태양의 후예라는 부족집단로, 코사라라 는 대국과 인접한 작은 나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대국에 속해 있었지만 민주적인 공화체제 아래 평화 롭고 자유로 왔던 그 나라의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석존은 성장하였습니다. 석가란 그 종족의 이름이고 모니는 Muni라는 말을 옮겨 쓴 것으로 성인(聖人)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에서 나신 성인]이라는 뜻으 로서 그 분의 본명이 아닙니다. 그 분은 고오타마 싯타르타라는 태자로서의 이름이 있었 고, 대각을 이룬 후에는 [불타] 즉 [깨달은 분]이라고 불 리게 되었습니다. 석존께서 부처가 된 뒤 비구들에게 지난 날의 왕자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에는 매우 행복했었다. 정원에는 연꽃이 피어나는 연못이 있었고, 내 방에는 늘 카시국에서 나는 전단향의 향기가 그윽했었다. 내가 밖에 나갈 때나 비나 추위 그리고 더위를 막기 위해 백산(白傘)이 받쳐졌고 계절에 따라 지내는 별장이 따로 있었고...] 이런 안온과 풍요로움 속에서 왕자로서 갖추어야 할 무예 와 학문을 익혔고, 17살 때 코리족의 선각왕의 딸인 야수다라와 결혼하였으며, 라훌라라는 아들을 낳았습니 다. 석존은 이와 같이 상류 계급의 귀공자로서 축복받으며 탄생했으나 7일만에 생모와 사별하는 슬픔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소양도 갖추었고 한 여성과의 사랑을 나 누는 등 인간으로서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모두 겪는 실인생(實人生)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는 늘 일말의 우수가 깃들어 있었 습니다. 궁전 안의 화사한 환락보다는 나무 그늘에 조용히 앉아 서 사색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사색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석존이 후일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듯 나의 출가 전의 생활이 행복했지만, 그것이 참된 행복, 즉 궁극적으로 고(苦)가 없는 그런 행복은 아니었다. 사람이 늙고 죽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그것을 피할 도리 를 깨닫지 못했으면서 남의 늙음. 남의 죽음을 보고도 자신 의 늙음. 죽음은 생각지 않고 혐오하고 비웃는 것은 어리 석음이다. 또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이다.] 그래서 싯타르타는 청춘에 대한 교만은 사라지고 병. 죽음 이라는 무거운 테마를 안고 우수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경전에는 도성의 4대문에서 각각 노인과 병자와 장례행렬 그리고 출가 사문(沙門)을 보고, 마침내 사문이 되어 고가 없는 최상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출가를 결심했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래서 싯타르타는 부모, 처자 그리고 부귀영화 등 세속적 인 일상생활을 버리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문제, 즉 고 (苦 : 生. 老. 病. 死)를 극복할 수 있는 길-진리-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또 싯타르타가 출가를 결심한 데는 당시 인도의 사회 여건 도 많이 작용했습니다. 당시 크샤트리아 계층 청년들의 꿈은 왕이 되어 영토를 넓 혀 강력한 왕국의 대왕이 되거나 아니면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출가해서 정신세계에 군림하는 성자가 되는 것이 었습니다. 싯타르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크샤트리아의 청년들이 우러러보는 대왕 이 되려면 막강한 군사를 이끌고 침략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에는 석가족은 더무 무력했으며 또 그런 침략주의를 좋아하 지도 않았으므로 싯타르타가 갈 길은 정신적인 성자(聖者) 의 길 뿐이었습니다. 생, 로, 병, 사 와 현세의 고뇌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성찰(省 察)한 싯타르타는 인간이 바라는 최고 최상의 이상 추구에 온 생애와 정열을 바치기로 마음에 굳게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싯타르타의 출가는 개인적인 고뇌의 해결이나 현세 적인 인간 고뇌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정열적인 과감한 결단이었습니다. - 불교기초교리문답 -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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