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가르침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7. 불교의 세계관

관리자 | 2006.03.14 05:11 | 조회 2846

7. 불교의 세계관

불교에서는 세계를 관계의 존재라고 한다.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세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기본 세계관은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그물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이 세계요 삶인 만큼 따로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삶의 문제를 나누어 사고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옳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문제를 다루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으므로 이해하는 데 도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언제나 총체적 관계성의 의미로 설명되고 있음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진실로 열의를 기울여 사유하는 성자에게 법의 참된 모습이 밝혀질 때 일체의 모든 의혹 사라졌으니, 연기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자설경(自說經)』 고요히 명상에 잠긴 수행자에게 진실의 법칙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순간 모든 의혹이 사라졌으니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의 원인을 알아낸 까닭이다. 『마하박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신의 감흥을 읊은 내용이다. 깨달음을 통해 밝혀낸 진리가 연기법임이 분명하게 잘 드러나 있다. 보통 ‘존재의 실상을 깨달았다.’ 또는 ‘진실의 법칙을 밝혀냈다.’고 한다. 수행을 통해 밝혀낸 ‘존재의 실상’ 또는 ‘진실의 법칙’이 연기법인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 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연기법이라고 한다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영원한 진리라고 했다. 여래의 출현 여부에 관계없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법칙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이 팔만 사천가지라고 하지만 그 어떤 내용도 연기법을 벗어난 가르침은 없다. 연기법은 불교의 전부이다. 연기법을 벗어나면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영원한 법칙으로서의 연기법, 불교의 기본으로서의 연기법, 불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연기법은 어떤 내용인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잡아함경』 일반적으로 연기법의 공식처럼 평가되는 경구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세계)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총체적 관계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것을 뜻한다.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의 세계관을 가장 깊고 풍부하게 다루는 경전이 『화엄경』이다. 특히 심오하고 불가사의한 연기법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멋진 비유가 인드라망 즉 제석천 궁전의 그물 비유이다. 인드라망 비유만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법의 세계관을 실감나게 잘 드러낸 비유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제석천 궁전에 투명한 구슬그물(인드라망)이 드리워져 있다. 그물코마다 박힌 투명구슬에는 우주삼라만상의 영상이 찬란하게 투영된다.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서로 다른 구슬에 투영된다. 이 구슬은 저 구슬에, 저 구슬은 이 구슬에, 작은 구슬은 큰 구슬에, 큰 구슬은 작은 구슬에 투영된다. 동쪽 구슬은 서쪽 구슬에, 서쪽 구슬은 동쪽 구슬에, 남쪽 구슬은 북쪽 구슬에, 북쪽 구슬은 남쪽 구슬에 투영된다. 너의 구슬은 나의 구슬에, 나의 구슬은 너의 구슬에, 정신의 구슬은 물질의 구슬에, 물질의 구슬은 정신의 구슬에 투영된다.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자연의 구슬은 인간의 구슬에, 시간의 구슬은 공간의 구슬에, 공간의 구슬은 시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총체적으로 중중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진다. 『화엄경』

화엄경
연기법의 세계관으로 보면 이 세상 어느 것 한 가지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없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중생과 부처, 신과 인간, 너와 나, 과거와 현재, 미래 등 모든 이 중중무진의 관계 속에 성립 전개되고 있다. 영원에서 영원 너머에 이르기까지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총체적 관계 속에 끊임없이 생성변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주요, 우리들의 삶인 것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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