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가르침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7. 선

관리자 | 2006.03.14 05:17 | 조회 2803

7. 선

1) 선(禪)의 기원 선은 고대 인도의 명상법인 요가(yoga)에서 비롯되어 붓다의 명상과 정각(正覺)을 통하여 새로운 불교의 실천 수행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요가의 기원은 B. C 3000년 경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실시되었다. 따라서 요가 명상인 선(禪)은 약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가라는 말은 사유(思惟) 혹은 명상(冥想)이라는 의미인데 ‘명상을 통하여 오감(五感)을 제어하고 산란한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 즉 모든 감각기관을 움직이지 않고 집중(執中)하여 마음을 통일시켜 적정상태에 머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요가는 삼매(三昧, sama-dhi), 선나(禪那, dhya-na)라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선나(禪那)로 사용되어 오다가 선(禪)이라는 말로 일반화되었으며, 대승불교에서는 선바라밀(禪波羅蜜)이라고 하였다.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 설하는 브라흐만교에서는 요가의 명상을 통하여 브라만과 아트만이 본래 하나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를 체득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붓다의 선정(禪定)은 제법의 본질인 연기(緣起)의 법을 깨닫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부처님은 출가하여 여러 수행자를 찾아 수행하는 가운데 수정주의(修定主義) 사상가를 찾아가 선정법을 닦았다. 이들의 주장은 요가의 선정을 통하여 정신집중을 이루어 일체의 정신적인 작용이 정지되어 적정(寂靜)의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고(苦)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처님은 이 선정법을 차례로 닦아 최고의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선정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선정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선정의 상태에 있을 때는 일체의 고에서 해탈된 경지를 얻을 수 있으나 선정에서 벗어나면 또 다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괴로움의 상태로 돌아오게 됨을 알고, 이러한 수정주의의 수행으로는 결코 완전하고 안온무고(安穩無苦)한 해탈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나서 수정주의를 버렸다. 그리고 다시 고행주의(苦行主義) 수행자를 찾아가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한 혹독한 고행을 닦았다. 고행주의자들은 인간이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육체가 있기 때문이며 육체를 괴롭혀 최극한의 경지에 이르면 정신적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온갖 어려운 최고의 고행을 모두 경험하였으나 육체적인 고행으로는 정신적 해탈의 경지를 얻을 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고행주의를 버렸다. 그리고 네란자라 강물에서 목욕하고 수자타에게 우유죽을 공양 받고 보리수나무 아래에 금강보좌를 만들어 깊은 선정에 들어갔다. 생로병사의 인간의 근본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길을 깊이 명상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새벽하늘의 샛별을 보고 스스로의 힘으로 연기의 법을 깨달았다. 부처님은 선정의 실천구조를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ana)으로 설명하고 있다. 보통 ‘지관(止觀)’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지는 사마타, 즉 삼매(三昧)로서 마음을 집중하여 산란심이 없는 경지를 말하고, 관은 비파사나로서 만법의 근원인 진리[緣起]를 관찰하여 깨닫는 것을 말한다. 즉 지는 번뇌가 없는 정적(靜的)인 마음상태인 선정을 가리키는 말이며, 관은 선정에서 일어나는 동적(動的)인 상태인 지혜를 나타내는 말이다. 부처님이 수정주의의 선정설(禪定說)을 버렸다는 것은 그것이 지의 상태에 머물러 버리는 선정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고(苦)에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지(止)의 선정에서 더 나아가 연기의 법을 관찰하는 지혜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깨달음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지관쌍수(止觀雙修)의 선정설을 확립하였다. 원시불교의 주요한 선정설로는 사선(四禪), 팔등지(八等持),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사선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선정이 가미되어 성립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 ① 사선(四禪) : 초선(初禪), 제이선(第二禪), 제삼선(第三禪), 제사선(第四禪). ② 팔등지(八等持) : 사선+사무색정(四無色定 :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③ 구차제정 : 팔등지+멸진정(滅盡定). 부파불교의 대표적 선정설로는 사념처관(四念處觀)과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염처(念處)란 곧 정신통일을 말한다. 사념처관 ① 신념처관(身念處觀) : 이 몸이 부정(不淨)하다고 관함. ② 수념처관(受念處觀) : 고락(苦樂) 등 감각 작용이 모두 고(苦)라고 관함. ③ 심념처관(心念處觀) : 의식[識心]이 생멸하여 항상하지 않음을 관함. ④ 법념처관(法念處觀) : 제법이 인연으로 생겨남으로 무자성(無自性)임을 관함. 오정심관 ① 부정관(不淨觀) : 탐욕이 많은 사람들이 닦음. 육체의 부정한 모양을 관찰하게 하여 자신의 육체에 대한 탐욕심과 집착심을 끊게 만드는 선정의 수행. ② 자비관(慈悲觀) :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닦음. 일체의 중생이 과거생으로 보면 모두가 나의 부모 형제 아님이 없음을 관찰하여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분노와 화내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선정의 수행. ③ 인연관(因緣觀) : 전도(顚倒)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닦음. 일체의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여 도리에 맞는 마음을 가지기 위한 선정의 수행. ④ 계분별관(界分別觀) : 모든 존재를 실체로 보는 사람들이 닦음. 일체의 현상하는 모든 존재는 영원한 실체가 없음을 관찰하여, 모든 존재를 바르게 보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선정의 수행. ⑤ 수식관(數息觀) : 마음이 산란한 사람들이 닦음. 자연계의 대기호흡을 관찰하고, 자신의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선정의 수행. 대승불교의 경전 가운데 선사상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경으로서는 대략『금강경』, 『화엄경』, 『유마경』, 『능가경』 등을 꼽을 수 있다. 반야의 공사상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설하고 있는데, 일체 모든 것은 연기하여 자성이 없으므로 독립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무자성의 공을 체득하는 것이 대승선이다. 『금강경』에서는 ‘즉비(卽非)의 논리’로 공이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다. 즉 ‘불법은 불법이 아니므로 그 이름이 불법이다[佛法者 卽非佛法 是名佛法]’라고 즉비의 부정의 논리를 전개하여 공을 설하고 있다. 그리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고 하는 무주(無住)사상 역시 선사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화엄경』의 해인삼매를 통하여 설하고 있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논리는 중생이 바로 부처[衆生卽佛]라는 돈오선의 이론적 기초가 되고 있다. 『유마경』의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 ‘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이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은 선의 실천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능가경』에서는 자각성지(自覺聖智)의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나는 최정각(最正覺)을 이룬 그 날 밤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일자(一字)도 설하지 않았다”라는 ‘일자불설(一字不說)’설을 주장하여 ‘이심전심, 불립문자(以心傳心 不立文字)’의 선사상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2) 선종과 선의 종류 선종(禪宗)이란 인도의 선이 중국에 전래되어 선 수증(修證)의 종지를 가지고 형성된 종파를 말한다. 선종의 초조는 보리달마(菩提達摩)이며, 혜가, 승찬, 도신, 홍인을 거쳐 신수와 혜능에 의해 북종과 남종으로 나뉘어져서 북종은 점수선, 남종은 돈오선을 각각 선양하였다. 남종 계통인 마조의 홍주종에 이르러 조사선의 생활종교로 발전하여 선종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이후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발전되고 그 중 조동종과 임제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종에서는 자파(自派)의 종지로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하고 있다. 교외별전이란 선의 입각처(깨달음)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의 길이 없어진[心行處滅] 경지임을 나타내는 말임과 동시에, 언어와 문자에 의지하는 교종(敎宗)의 가르침에 대해 이심전심의 마음을 강조하여 말보다 마음이 우월하다는 종파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불립문자란 앞에서 말한 “언어문자를 초월한 선의 경지를 나타내기 위해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불립문자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언어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직지인심의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부처의 성품을 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달마는 ‘성품이 곧 마음[卽性卽心]’이라고 말하고, 마조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말하고, 임제는 ‘사람이 곧 부처[卽人卽佛]’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참성품을 보게 되면(깨달으면) 바로 부처가 된다는 의미로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선불교는 대승불교의 실천적 계승이다. 대승불교는 근본불교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즉 부파불교가 부처님의 근본 종지를 오해하고 생사를 떠나 단멸공(斷滅空)에 안주하는 것으로 열반을 삼음에 대해 무주생사(無住生死 : 생사에 머물지 않음), 무주열반(無住涅槃 : 열반에도 머물지 않음)의 무주행, 즉 반야바라밀의 보살행을 근간으로 근본불교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한다.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마저 버리는 대승보살행은 중국선종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역동적 실천사상으로 계승되어 진다. ‘견성성불, 요익중생’이 선의 정신이다. 선의 내용에 따른 분류는 『대지도론』 17권에서는 외도선(外道禪), 성문선(聲聞禪), 보살선(菩薩禪)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능가경』에서는 사종선(四種禪)을 설하고 있다. 첫째,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은 성문ㆍ연각ㆍ외도 수행자의 선정으로서 자기의 이 몸은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한 것이라고 관하고 인무아(人無我)라는 입장에서 설해진 선을 말한다. 둘째, 관찰의선(觀察義禪)으로 의(義 : 意味)를 관찰하는 대승공관의 선정을 들고 있다. 여기의 ‘의’란 법(法 : 사물, 존재)이라는 의미로서, 자기의 몸[人]과 일체의 객관 존재[法]도 공ㆍ무아라고 관하여 인법이무아(人法二無我)를 깨닫는 선을 말한다. 셋째, 반연여선(攀緣如禪)은 진여(眞如)를 소연(所緣)으로 하는 선이다. 일체의 존재는 공한 것이다라고 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여래의 법신인 진여불성은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인 것으로 관하는 것을 말한다. 넷째,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은 일체의 삼매를 총괄하는 선정으로, 여래의 깨달음의 경지인 자각성지(自覺聖智)에서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의 자비 행화에 대해 전념하는 선을 말한다. 종밀은 『도서』에서 종래의 여러 선정설을 종합하여 외도선ㆍ범부선ㆍ소승선ㆍ대승선ㆍ최상승선(最上乘禪 : 여래선)의 5종선으로 분류하고 있다. 훗날 선종에서는 여래선과 조사선으로 나누어 여래선에 대한 조사선의 우위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여래선을 중국적 조사불교의 관점에서 조사선이라 부르는 것이다. 3) 중국 선종사상의 전개 중국에 선(禪)이 전래된 것은 후한(後漢) 이래 선경(禪經)이 번역된 이후의 일이다. 안세고가 소승계의 선경인 『안반수의경』 및 『선행법상경』 등을 번역하였으며, 지루가참이 대승계의 선경인 『반주삼매경』과 『도행반야경』 등을 번역하였다. 특히 수식관을 주로 설하고 있는 『안반수의경』은 달마가 중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중국 선종이 흥기되기 이전에 초기 중국의 습선자(習禪者)들에게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중국 선종은 초기에 천태선과 달마선으로 출발하였으나 뒷날 달마계통의 선종으로 통합되었다. 보리달마에 의해 시작된 달마선은 『능가경』의 ‘불어심위종(佛語心爲宗)’의 ‘불심제일(佛心第一)’로 그 사상적 근간을 삼았기 때문에 능가사(楞伽師) 혹은 불심종(佛心宗)이라고 부른다. 달마 능가선의 핵심사상으로는 ‘이입사행(二入四行)’설을 들 수 있는데, 즉 도에 들어가는 두 종류의 문(二入)에는 이치로 들어가는 ‘이입(理入)’과 실천행으로 들어가는 ‘행입(行入)’이 있다고 설한다. 이입이란 ‘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종(宗 : 心, 禪)을 깨달아[藉敎悟宗]’, 궁극에는 범부와 성인이 동일한 참성품[眞性], 즉 불성을 깨달음을 말한다. 행입에는 네 가지의 실천행이 있는데, 보원행(報怨行 : 빚을 갚는 행), 수연행(隨緣行 : 인연에 따르는 행), 무소구행(無所求行 : 구하는 바가 없는 행), 칭법행(稱法行 : 법에 합일된 행)을 말한다. 그리고 달마의 독창적 선법으로 ‘안심법문(安心法門)’을 들고 있는데 ‘이입(理入)이란 안심(安心)이며, 안심이란 벽관(壁觀)이다’라는 말에 기인한다. 벽관의 벽(壁)이란 ‘객진위망(客塵僞妄)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벽관이란 모든 번뇌와 거짓된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심불기(心不起)의 순일무잡(純一無雜)한 본래 마음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달마의 벽관을 위주로 한 선법은 혜가에게 전해지고, 혜가는 승찬에게 전하여 능가종을 이루게 된다. 승찬은 『신심명』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진위는 불분명하다. 능가사들이 남천축일승종(南天竺一乘宗)의 입장에서 무득정관(無得正觀)의 선사상을 전개하고 있을 때 황매(黃梅)의 쌍봉산(雙峰山)을 중심으로 달마선종의 4조 도신(道信)이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실천불교를 선양하여 그 문하에 500여명의 수선자들이 운집하였으니 이로부터 명실상부한 선종(禪宗) 교단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또 도신의 제자 홍인(弘忍)이 쌍봉산의 동산으로 옮겨 수선도량을 개창하여 천여 명의 대중이 모여 수선하였는데 도신, 홍인의 선법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 부른다. 동산법문의 핵심사상은 도신의 ‘수일불이(守一不移)’사상이다. 수일불이란 “공정(空淨)의 눈을 가지고 주의하여 일체를 관하며, 낮과 밤의 구별없이 오로지 모든 정력을 쏟아 항상 동요함이 없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는데, 마음을 하나의 사물에 집중시켜 관(觀)하게 하는 구체적인 좌선 실천법이다. 홍인은 도신의 수일불이의 좌선법을 계승하여 ‘수본진심(守本眞心)’의 선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의 본심이 바로 부처임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천경만론(千經萬論)이 각자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守本眞心)만 못하다”고 설하여 수본진심을 강조하고 있다. 도신, 홍인의 동산법문의 교단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좌선과 노동을 병행한 생산적 교단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는 훗날 백장청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홍인의 문하에는 뛰어난 십대제자가 있는데 그 중 북종의 신수와 남종의 혜능을 대표하여 ‘남능북수(南能北秀)’라 일컫는다. 낙양과 장안을 중심으로한 제도(帝都)불교를 이끈 북종의 신수는 양 수도의 법주[二京法主]요, 세 황제의 국사[三帝國師]로서 달마 이래의 안심법문을 계승하여 점수(漸修)에 의한 이념선(離念禪)을 선양하고 있다. 『육조단경』에 나타난 신수의 게송, 즉 “몸은 보리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時時勤拂拭],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莫使有塵埃]”는 가르침은 북종의 점수선적 가풍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반면 남종의 혜능은 남방(광동 소관)을 중심으로 한 서민불교를 지향하고 있는데, 무념(無念), 무상(無相) , 무주(無住)를 종지로 하는 식심견성(識心見性)의 돈오(頓悟)적 무념선(無念禪)을 주창하였다. 『단경』의 혜능의 게송, 즉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菩提本無樹],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明鏡亦無臺],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佛性常淸淨 : 이 본에는 本來無一物],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何處有塵埃]”라는 구절은 남종의 돈오선적 가풍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당시 정통과 주류의 위치에 있던 북종 신수계를 향해 “사승은 방계요(師承是傍), 법문은 점수(法門是漸)”라고 공격하며 혜능을 달마선의 6조로 현창한 인물이 신회이다. 사실 돈오선은 혜능에 의해 주창되었지만 돈오선의 지위는 신회의 육조현창운동에 의해 확립된다. 혜능 사후 남종선은 신회의 하택종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다가 곧이어 마조의 홍주종과 석두의 석두종 계통으로 넘어가게 된다. 즉 달마, 혜가로부터 비롯되는 중국 선종은 초기의 능가종, 동산법문, 북종선과 남종선의 시대를 거쳐 9세기를 전후하여 강서(江西)의 마조 도일(馬祖道一)과 호남(湖南)의 석두 희천(石頭希遷) 및 그들 문하에서 배출된 뛰어난 선승들의 활약에 의해 조사선(祖師禪)의 생활종교로 발전하게 된다. 마조계 선종의 특징의 하나는 그 문하에 용상대덕(龍象大德)이 수없이 많이 배출되고 다양하고 조직적인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당집』에는 친승제자가 88인, 현도(玄徒)가 천여 명, 『전등록』에는 입실제자가 139인으로 각기 한 지방의 종주로서 행화를 펼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선종이 이미 마조계 홍주종(洪州宗)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혜능으로부터 시작된 조사선의 종지는 마조계 홍주종에 이르러 만개하게 되는데, 그 주요 사상으로는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이 부처이다)’과 ‘비심비불(非心非佛 :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 그리고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 평상심이 도이다)’ 등 조사선 특유의 일상성의 선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홍주종의 뛰어난 선승으로는 서당 지장, 백장 회해, 남전 보원, 대주 혜해 등 수없이 많다. 그 중 백장은 선종 최초로 『선원청규(禪苑淸規)』를 제정하여 이전의 율종(律宗)으로부터 선종교단을 독립시키고 있다. 사실 중국 선종의 비약적인 발전은 선승들이 집단적인 수행생활의 규범과 주체적인 교단의 조직 및 운영 등을 위해 체계적으로 성문화 된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제정과 더불어 정착되었다. 오늘날 『백장청규』의 전모는 알 수 없으나 선수행자를 위한 중국 특유의 선문규식(禪門規式)으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전 대중이 생산노동에 참여해야 하는 보청(普請)의 법을 제정한 것이다. 유명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명구도 이로부터 나오게 된다. 백장의 뛰어난 제자로는 위산과 황벽을 들 수 있다. 위산(噴山)은 제자 앙산(仰山)과 더불어 선종 오가(五家) 중 가장 먼저 위앙종(噴仰宗)을 개창하고 있으며, 황벽은 ‘직하무심(直下無心)’의 무심법문을 강조하였으며, 그 문하에 유명한 임제가 배출되어 임제종(臨濟宗)이 탄생된다. 임제의 사상으로는 ‘무위진인(無位眞人 : 아무 가식이 없는 참사람)’, ‘평상무사(平常無事 : 할 일을 다 마친 일없는 경계)’,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 곳에 따라 주체적인 삶을 살면, 어느 곳이나 진실의 세계)’ 등 수연자재한 대자유인으로서의 인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석두 문하에 조동종(曹洞宗)과 운문종(雲門宗) 및 법안종(法眼宗)이 개창되어 마조(馬祖) 문하의 위앙종(噴仰宗), 임제종(臨濟宗)과 더불어 선종 오가(五家)가 펼쳐지게 된다. 아울러 임제종에서 분파된 황룡종(黃龍宗)과 양기종(楊岐宗)을 더해 선종에서는 일반적으로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 부른다. 그리고 송대(宋代)에 이르러 조동종 계통의 굉지정각(宏智正覺)에 의해 묵조선(默照禪)이 제창되고, 임제종 양기파 계통의 대혜 종고(大慧宗豈)에 의해 간화선이 집대성 된다. 묵조선의 묵(默)은 묵묵히 좌선하는 것이며, 조(照)는 비추는 작용(照用)으로서 심성(心性)의 영묘한 깨달음의 작용을 말한다. 즉 묵묵히 좌선하는 그 가운데 영묘한 마음의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앉아있음의 좌선을 매우 중시한다. 간화선은 옛 조사들의 깨달음의 기연(機緣 : 因緣)인 공안(公案: 話頭)을 참구하는 선수 행법이다. 공안이란 ‘관공서의 문서’라는 뜻으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절대성의 법칙을 말한다. 선문에서는 불조(佛祖)가 개시한 불법의 도리를 의미하며, 수선자들이 분별의식을 떨쳐버리고 조사들의 공안을 참구하여 깨달아야 할 문제의식(現成公案)으로 보고 있다. 즉 인식주관과 객관대상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분별심과 차별심을 떨쳐버리고 그 곳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는 일체의 허구적이고 비실제적인 의식의 작용을 끊는 절대적인 참선의 방편이며, 이러한 화두 참구의 목적과 방법은 화두에 대해 간절한 의심을 일으켜 이 의심에 모든 의식작용을 집중시켜 바깥 경계로 의식이 지향하는 것을 끊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직관(直觀)하는 것이다. 4) 한국선(韓國禪)의 전개 한국선의 정신은 원효의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이라는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 선(禪)이 본격적으로 전래되기는 신라 말 시작하여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구산(九山)으로 대표되는 선문(禪門) 이 개창되는 때의 일이다. 구산선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처음으로 법랑(法朗)이 중국 선종 4조 도신의 법을 전해왔고, 그의 제자 신행(信行)이 또한 신수 보적 계통의 북종선을 전수받아 와서 준범(遵範)에게 전하고, 혜은(惠隱)을 거쳐 뒷날 지선(智詵)에 의해 문경 봉암사에서 희양산문(曦陽山門)이 건립된다. 그리고 ② 도의(道義)는 마조계통의 홍주종 서당 지장에게 남종선법을 전수받아 귀국하여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였으며, 그 문하의 염거(廉居)련셋?體澄)에 의해 장흥 보림사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이 건립되고 있다. ③ 홍척(洪陟) 또한 서당 지장의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 남원 실상사에서 실상상문(實相山門)을 개창하였으니 연대적으로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빠르다. ④ 혜철(慧哲) 역시 서당 지장으로부터 선법을 전수받아 곡성 태안사에서 동리산문(桐裡山門)을 건립하였으며 문하에 도선국사가 있다. ⑤ 현욱(玄昱)은 마조의 다른 제자 장경회휘의 법을 이었으며, 그의 제자 심희(審希)에 의해 창원 봉림사에서 봉림산문(鳳林山門)이 건립된다. ⑥ 무염(無染)은 마조 문하의 마곡 보철의 법을 이어서 보령 성주사에서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하였으며, ⑦ 범일(梵日)은 마조 문하의 염관 제안의 법을 받아 강릉 굴산사에서 사굴산문(淞堀山門)을 건립하였다. ⑧ 도윤(道允)은 마조의 제자 남전 보원에 사사하고 귀국하여 화순 쌍봉사에서 선법을 폈으며, 그의 제자 절중(折中)에 의해 영월 법흥사에서 사자산문(獅子山門)이 건립되었다. ⑨ 이엄(利嚴)은 조동종의 운거 도응에게 심인을 받아 해주 광조사에서 수미산문(須彌山門)을 개창했다. 이로써 구산선문이 모두 건립되는데 실제로는 구산선문 이 외에도 혜소(惠昭), 순지(順之) 등이 산문을 건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산선문이 표방하는 선의 종지는 ‘무위임운(無爲任運)’, ‘무념무수(無念無修)’로서 남종선의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하는 돈오견성의 무념법문을 토대로 하고 있다. 나말여초에 형성된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한 선불교가 고려 중기에 이르러 보조 지눌에 의해 다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보조는 길상사(현, 송광사)를 수선사(修禪社)로 고치고 정혜결사(定慧結社)의 근본도량으로 하여 참선을 위주로 한 결사불교를 전개하였다. 정혜결사의 이념은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에 힘쓰고 예불전경(禮佛轉經)으로 노동운력하며, 인연 따라 어느 곳에서나 성품 단련에 힘을 쓰며, 진인달사(眞人達士)들이 세상을 통쾌하게 살다간 고행(高行)의 길을 본받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혜결사의 수행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 등이며, 성적등지문에서 정혜쌍수, 돈오점수(頓悟漸修), 원돈신해문에서 화엄과 선의 일치인 선교회통(禪敎會通), 경절문은 화두 참구에 의한 간화선의 수행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보조는 『간화결의론』을 저술하여 한국불교 최초로 간화선을 선양하고 있다. 보조가 결성한 수선사에는 이후 혜심(慧諶), 몽여(夢如), 혼원(混元) 등 16국사를 차례로 배출하게 되는데 이로써 송광사는 승보사찰이 된다. 고려 말에 선을 중흥하고 있는 선사로는 태고 보우(太古普愚), 나옹 혜근(懶翁慧勤), 백운 경한(白雲景閑)을 들 수 있는데, 세 사람 모두 원나라에 유학하여 임제정맥을 이어 간화선풍을 진작시키고 있다. 태고는 가지산문에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다시 원나라로 건너가서 석옥 청공(石屋淸珙)에게 참문하여 인가를 받았다. 태고는 임제의 정종(正宗)을 해동에 전해 간화선을 불러일으켜 송의 대혜 종풍을 계승했다. 그의 선풍은 ‘인간 본연에 돌아가 불조의 본지(本旨)에 의거하여 시방세계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서원력을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고와 함께 석옥의 법을 이어받은 사람이 경한인데, 그는 무심무위(無心無爲)의 선지를 강조하고 있다. 나옹은 공덕산 요연에게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에서 개오하고, 원나라로 들어가 연경의 법원사에서 인도 승 지공(指空)에게 참배하고, 임제의 정맥을 계승한 평산 처림(平山處林)에게 입실하여 불자(拂子)와 법의를 받았다. 나옹의 선사상은 “선수행자가 돈독한 신심을 가지고 여일하게 화두만을 참구한다면 승속과 노소, 또는 초참후학에 관계없이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체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의 불교를 한마디로 특징 지워 말하면 산중불교(山中佛敎)라 할 수가 있다. 조선의 숭유배불 정책으로 말미암아 종파가 강제로 통폐합되어 11종이 7종이 되고, 7종이 다시 교종과 선종의 양종으로 재편되었다. 결국 산중에 은거한 선종만이 남게 되었으니 오늘의 조계종이 바로 이 통불교(通佛敎)적 선종에 해당된다. 이런 폐불의 시기에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이 출세하여 한 때 선을 부흥시켰다. 『선가귀감』에서 휴정의 선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그는 선교관에 대하여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을 교(敎)라 하고,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이 선(禪)”이라고 규정하고, “누구나 말에서 잃어버리면 염화미소가 모두 교적(敎迹)이 되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다 교외별전의 선지(禪旨)가 된다”라고 하여 선교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화두 참구에 의한 공부(간화선)를 강조하고 있는데, 참구 방법에 대해 “대저 학자는 모름지기 활구(活句)만을 참구할 것이며, 사구(死句)는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화두에는 어구(語句)와 의의(意義)의 두 가지 문이 있다. 어구를 참구한다는 것은 경절문의 활구이니, 마음의 길도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모색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의의를 참구한다는 것은 원돈문의 사구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참선에는 반드시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하는데, 삼요란 첫째, 대신근(大信根)이 있어야 하며 둘째, 대분지(大憤志)가 있어야 하며 셋째, 대의정(大疑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삼요가 갖추어지면 화두를 결택하여야 하는데 화두에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는가?)’, ‘시심마(是甚匿 : 이뭣고?)’,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 뜰 앞에 잣나무)’, ‘마삼근(痲三斤 : 삼 서근)’, ‘건시궐(乾屎猛 : 마른 똥막대기)’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 본래 모습)’ 등 1700가지 공안이 있다. 그는 참선하는 사람의 정신에 대해 “한 생각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생사라 하는데, 이 생사의 사이에 있으면서 모름지기 힘을 다해 화두를 들어야 한다. 화두에 간단(間斷 : 사이가 끊어짐)이 있으면 곧 생사라 하고 번뇌라 한다. 화두가 불매(不昧)하면 곧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며, 스스로의 집이 된다. 사대(四大)로 된 이 추한 몸이 찰나 찰나에 쇠하고 썩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사은(四恩)의 깊고 두터움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음을 알고 있는가. 일어나고 앉기가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것이 참선하는 사람의 일과로 삼아야 할 일이므로 또한 점검하고 점검해야 한다”라고 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승정신으로 선지를 삼고 있다. 그는 또한 출세 자유인의 깨달음의 경지를 “신령스러운 빛이 어둡지 않아서 만고에 길이 빛난다[神光不昧 萬古徽猷]”라고 설하고 있다. 조선 말기에 활약한 경허(鏡虛)는 쇠미해진 선풍을 다시 진작시키고 있으며, 그의 문하에 만공, 해월, 수월, 한암 등의 걸출한 선승이 배출되어 근대선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용성(龍城)은 대각운동과 생활선을 주창하며 독립운동과 교화에 진력하고 있다. 그의 제자로는 동산, 인곡, 동헌, 고암, 자운 등이 있으며, 성철 또한 그 문손이다. 만공, 용성은 근대 한국선(韓國禪)을 중흥시킨 양대 산맥이다. 5) 선(禪)과 현대 현대사회에 있어서 왜 선수행이 필요한가. 인간성 상실, 물질지상주의, 환경오염, 전쟁과 기아 등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 선은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 현대인들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신적 빈곤을 느끼며 정체성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문화가 있기 때문이지만, 현대의 과잉 문화현상 속에서 인간은 먹고, 놀고, 마시는 소비적 향락문화에 매몰되어 가고 있다. 소비와 향락은 물질만능주의의 필연이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생은 무의미하다. 소위 먹고, 자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 등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도 할 줄 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른 아름다운 영혼과 이성을 가꾸고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영혼과 이성을 가진 사람을 참사람[眞人]이라 한다. 따라서 불교는 모든 육체적 욕망과 허위의식을 비우고 인간의 본래모습인 참사람(순수인간)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순수인간은 마음이 텅 비어 일체 물질경계에 얻을 바가 없음[無所得]을 알기 때문에 허위의식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얻을 바 없음을 깨닫는 것이 선(禪)이다. 선은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세 가지 쓰레기(얻음의 세계)를 말끔히 쓸어낸 ‘빈 마음’에 서 있기를 권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무한욕망으로 가득 채우는 것만을 미덕으로 여긴다. 물질과 허위의식으로 채워진 현대인은 가장 중요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았는데, 인간성은 객관경계에 오염된 허위의식을 비워버림으로써 다시 회복할 수 있다. 텅 비워버린 마음에서 창조적인 생각이 나오게 되며, 굳은 의지가 창출된다. 비운 마음이 청정한 본성이요, 불성이요, 부처이다. 따라서 선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부처(衆生本來佛)임을 강조하고, 본래 부처인 인간이 무한한 존엄성을 가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편리한 것이 반드시 행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편리함은 더욱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현대인은 밀려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의식작용이 더욱 복잡해져서 번민과 고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생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내면적인 스트레스, 즉 마음의 얽매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내적 자유를 간절히 희망한다. 이러한 때 선은 우리에게 절대자유의 경지인 해탈의 방법을 일러준다. 직하에 무심하라[直下無心], 즉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일체 경계에 얽매인 마음을 일시에 놓아라[放下着]’고 가르친다. 무심이란 아무 생각이 없는 목석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무심이란 일체를 생각하되 생각하지 않음[於念而不念]이다. 다시 말하면 분별하되 분별하지 않음이요, 분별하지 않되 잘 분별함이 무심의 상태이다. 즉 마음이 일어나지도 않고[無生心], 멸하지도 않는[無滅心]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중도정심(中道正心)이 무심이다. 그러므로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객관대상[境界]을 대하여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생하지 않음[不生]이라고 하며, 생하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고, 생각이 없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해탈이란 궁극적인 내적 자유와 평안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선은 ‘일체 존재가 모두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가르친다. 모든 생명이 부처이며 모든 국토가 정토임을 설파한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 따라서 ‘직심이 도량이며[直心是道場], 직심이 정토[直心是淨土]’라고 말한다.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이니 상호 존중할 수밖에 없으며, 일체 사물과 국토가 정토이니 아끼고 가꾸어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결론적으로 현대인은 마음 밖의 대상을 소유함으로 행복을 구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과 다른 인간과 사물(자연)에 대한 참된 이해와 관계가 상실되었다. 선(禪)을 통하여 ‘인간이 바로 부처’라는 주체적 삶을 회복하고, ‘모든 사람이 불성의 존재’라고 하는 인간 신뢰와 존중을 확립하며, ‘우주(자연)와 인간이 하나’라는 생명 공동체적 삶을 살아야 한다. 선은 항상 깨어있는 마음, 열려있는 마음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질, 사람과 우주 사이에 항상 깨어있고 열려있는 사람이 바로 선을 닦는 사람[禪師]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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