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가르침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1. 중관

관리자 | 2006.03.14 05:15 | 조회 2714

1. 중관

1) 반야 공사상과 중관학 『반야심경』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색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색이며, 수와 상과 행과 식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색, 수, 상, 행, 식은 5온(五蘊)이기에, 이 구절은 ‘5온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5온이다’로 풀이된다. 그리고 5온이란 나와 나를 둘러싼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가리키기에 이 구절은 다시 ‘모든 것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모든 것이다’로 바꿔 쓸 수 있다.
반야심경8곡 병풍
‘공’이란 말은 쑤냐(Su-nya)라는 범어를 한자로 번역한 것인데, 쑤냐는 ‘텅 비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그대로 공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이 그대로 텅 비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반야심경』에서는 공의 경지에 5온도 없고 12처도 없으며 18계도 없고 12연기도 없으며 사성제도 없다고 설한다[空中 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5온이나 12처, 18계는 모두 세상만사에 대한 불교적 분류 방식들이다. 동일한 세상만사를 간략히 분류하면 5온이 되고, 더 세분하면 12처가 되며, 좀 더 세분하면 18계가 되는 것이다. 이런 5온, 12처, 18계설은 모두 부처님께서 무아의 진리를 설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교리들이었다. 또 12연기와 사성제는 깨달음과 관계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궁극적 경지에는 5온, 12처, 18계와 같은 세상만사는 물론이고, 12연기와 사성제와 같은 불교의 핵심교리조차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겉보기에 이 세상도 부정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부정하는 듯하다. 그러면 『반야심경』에서는 어째서 이렇게 세상만사가 텅 비어 있고 불교의 핵심교리들이 모두 없다고 부정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흔히 뗏목에 비유된다. 세찬 물살이 흐르는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과 같은 배가 필요하다. 강의 이쪽 언덕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윤회의 세계에 비유되고, 강의 저쪽 언덕은 열반의 세계에 비유된다. 윤회의 강둑[此岸]에서 열반의 강둑[彼岸]으로 건너가기 위해 우리는 뗏목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널 경우 뗏목에서 내린 후 저쪽 강둑으로 올라가야 강을 건너는 일이 끝나듯이, 불교 신행자의 경우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뗏목을 타고 피안의 열반에 도달한 후에는 그 가르침의 뗏목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저 쪽 강기슭에 도착했는데도 뗏목을 타고 있으면 아직 열반의 언덕에 완전히 도달한 것이 못 된다. 진정한 열반의 언덕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궁극적 경지인 열반의 경지, 다시 말해 공의 경지에는 ‘5온도 없고, 12처도 없고 … 사성제도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분석에 의해 세상만사를 설명하는 불교 교학의 한 분야가 바로 중관학(中觀學)인 것이다. 2) 중관학의 성립과 중관논서 중관학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용수(나가르주나 : 150~250경)에 의해 창안되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500여 년이 흐른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생겨 인도불교 내에는 약 20여 종의 교단이 난립하게 된다. 이들의 불교는 종파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부파불교, 경전을 체계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아비달마불교, 대승불교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소승불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런 아비달마불교는 『아함경』 등에 흩어져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각 부파에서 자신들이 구성한 교학 체계만이 진실이라고 고집하는 경우에 문제가 된다. 이는 앞에서 설명했던 ‘가르침의 뗏목’에 대한 집착에 비교된다. 중관학의 창시자인 용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바로 이들의 아비달마교학이었다. 용수는 반야경의 공사상과 『아함경』의 연기사상에 토대를 두고, 중관적 논법을 창안한 후 이를 구사하며 갖가지 아비달마 교학에 내재하는 모순을 지적하였다. 중관적 논법, 즉 중관 논리란, 모든 것이 공하다는 점을 논증한다는 점에서 ‘공의 논리’라고 부를 수 있고, 갖가지 개념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해탈의 논리’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일상적 사유를 해체시킨다는 점에서 ‘해체의 논리’라고 부를 수도 있고, 논리적 사유의 한계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반논리(反論理)’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중관 논리는 용수의 『중론』, 『회쟁론』, 『십이문론』, 『광파론』, 『대지도론』 등과 그 제자 아리야제바(170~270경)의 『백론』, 『사백관론』 등에 잘 표출되어 있다. 3) 중관 논리 ‘중관(中觀)’이란 용어는 『중론』에 대한 주석서인 길장(吉藏 : 549~623년)의 『중관론소(中觀論疏)』에서 나온 것으로 ‘중도적으로 관찰한다’ 또는 ‘중도적으로 분석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런데 중도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불고불락(不苦不樂)과 같이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적 수행관 모두를 비판하는 ‘실천적 중도’이고, 다른 하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비유비무(非有非無)와 같은 ‘사상적 중도’이다. 중관 논리에서 ‘중도적으로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이 중 후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불생불멸, 불상부단 등의 경구에서 보듯이 여기서 말하는 중도는 ‘가운데의 길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생과 소멸, 상주와 단멸, 있음과 없음 등은 우리 생각의 양극단이다. 우리의 생각은 극단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있는 것을 부정하면 없는 줄 알고, 발생을 부정하면 소멸인 줄 알며, 상주함을 부정하면 단멸인 줄 안다. 이것이 소위 흑백논리이다. 흑을 부정하면 백인 줄 아는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 생각은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중관학에서는 흑과 백의 양극단 모두를 부정한다. 흑도 틀리고 백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흑과 백이 혼합된 회색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흑과 백이 모두 틀렸음을 알려 줄 뿐이다. 새롭게 알려 줄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삼론종의 길장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불렀다. 파사현정이란 잘못된 것을 파하는 행위 자체가 그대로 옳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중관학에서 말하는 중도의 진정한 뜻이다. 중도의 ‘중’자에는 이렇게 ‘양극단 모두 틀렸다’는 비판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텅 비어 있음’을 의미하는 ‘공’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중관학에서는 흑백 논리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생각에서 모순을 지적해 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과거의 아비달마 교학에서 뿐만 아니라, ‘바람이 분다’거나 ‘비가 내린다’, ‘내가 살아 있다’는 등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에서도 논리적 모순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일상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관학 논서가 난해한 이유는, 반논리(反論理)인 중관 논리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관 논서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난해하기 그지없는 아비달마 교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중관 논리의 난해한 교리들은 우리의 일상적 삶과 연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중관학의 견지에서 볼 때, 비단 아비달마 교학만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사유 전체가 모순에 빠져 있다. 아비달마 교학의 모순은 우리의 사유가 갖는 총론적 모순의 각론에 해당할 뿐이다. 중관적 방식, 중관 논리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사유, 우리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논리적 사유란, 개념을 ‘설정’하고, 그렇게 설정된 개념들을 연결하여 ‘판단’을 만들고, 판단들을 모아 삼단논법과 같은 ‘추론식’을 작성함으로써 진행된다. 그러나 반논리학인 중관학에서는 공과 연기의 교설에 의거하여 개념의 실재성을 비판하고, 사구부정(四句否定)의 논리에 의해 모든 판단의 사실성을 비판하며, 상반된 추론을 제시함으로써 어떤 추론의 타당성을 비판한다. 결국 논리적으로 작동되는 우리의 사유 그 자체를 모두 비판한다. 그러면 이러한 비판 중 일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지금 우리 눈앞에 어떤 길이의 막대기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누군가가 이 막대기의 길이가 어떠하냐고 우리에게 물었을 때, 우리는 길다고 대답할 수도 있고 짧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이보다 짧은 막대를 염두에 두고, 비교했다면 ‘길다’고 대답할 것이고, 이보다 긴 막대를 염두에 두었다면 ‘짧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동일한 막대기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막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에 따라 이렇게 그 대답이 달라진다. 이것이 연기와 공의 의미다. 긴 것이 있기 때문에 짧은 것이 있는 것이고, 짧은 것이 있기에 긴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막대의 길이는 원래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이 막대의 길이는 공하다. ‘이 막대의 본래적 길이는 없다’는 것을 ‘이 막대의 길이에 자성이 없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길이, 모든 크기가 이와 마찬가지다. 작은방을 염두에 두면 이 방은 큰방이 되고, 더 큰방을 염두에 두면, 이 방은 작은방이 된다. 이 방의 원래 크기는 공하다. 잘 생김과 못 생김, 부유함과 가난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등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동일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이쪽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저쪽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상대적인 개념들을 예로 들어 공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마치 수학문제에서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가 있듯이,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할 때 그 모든 것들 중에는 공함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이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반야심경』에서는 ‘눈도 없고, 그 대상인 색도 없다’고 설하는데,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해명한다.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마치 칼날로 칼날 자체를 자르지 못하듯이, 나의 눈으로 나의 눈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불은 뜨거운 것이 그 본성이고, 물은 축축한 것이 본성이듯이 눈은 ‘보는 힘’을 본성으로 갖는다. 혹자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자신의 눈을 볼 수 있다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거울에 비친 눈은 ‘대상세계인 색[色境]’의 일부이지, ‘보는 힘[能見性]’을 갖는 것이 아니기에 진정한 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스스로 보려 하든, 거울에 비추어 보든 나의 눈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눈이 없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눈[能見]이 없기에 그 대상[所見]인 색도 있을 수 없다. 마치 짧은 것을 염두에 두어야 긴 것이라는 의미가 발생하듯이, 눈을 염두에 두어야 눈에 비친 대상이라는 생각이 발생하게 되는데, 눈이 없다면 그 대상도 있을 수 없다. 또 눈[能見인 眼根]도 없고 대상[所見인 色境]도 없다면, 그 양자의 관계인 봄[眼識]도 있을 수가 없다. 위에 인용한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는 반문은 이를 의미한다. 4) 공의 자가당착과 이제설 중관학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일체의 존재는 물론이고 일체의 판단, 일체의 사유를 모두 비판한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아비달마 교학에서 논리적 모순을 지적해 내는 중관학이지만, 아비달마 교학의 효용성조차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관학에서는 아비달마 교학을 대하는 실재론적 태도가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할 뿐이다. 『대지도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보살은 모든 존재가 사연(四緣)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관찰하여 알지만 사연이 확고히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 반야바라밀에서는 다만 사견(邪見)을 제거하는 것이지 사연을 파하는 것은 아니다. 아비달마 교학 역시 부처님의 교설을 담고 있는 훌륭한 뗏목인 것이다. 뗏목이 없다면 우리는 강을 건널 수조차 없다. 그리고 중관학에서 ‘언어와 생각에 의해 구성된 모든 것은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는 점을 가르치긴 하지만, 중관학 역시 ‘언어와 생각’을 이용하여 공을 논증하기에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회쟁론』의 적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만일 모든 것이 공하다면 모든 것이 공하다는 그 말도 공할 테니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다시 말해 ‘모든 이론이 다 틀렸다’고 할 경우 ‘모든 이론이 다 틀렸다’는 말도 ‘이론’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역시 ‘틀린 것’이어야 한다는 식의 지적이다. 용수는 이에 대해서도 깔끔하게 해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깨끗한 벽에 ‘낙서금지’라는 말을 쓸 경우 그 말도 낙서에 속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벽에 낙서를 해 놓았을 때, 그 위에 ‘낙서금지’라는 말을 쓸 경우에는 그 ‘낙서금지’라는 말 역시 낙서이기에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말이긴 하지만, 앞으로의 다른 낙서를 금지시켜 주는 효용이 있다. 다른 모든 불교 교리가 그러하듯이 중관학 역시 응병여약(應病興藥)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중론』의 적대자는 ‘모든 것이 공하다’고 주장할 경우 사성제도 부정하고 삼보도 부정하게 된다고 말하며 공의 교리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사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계율도 공하기에 계율을 지킬 필요도 없고, 보시도 공하기에 남에게 베풀 필요도 없고, 사성제도 없고, 삼보도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용수는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라는 이제설(二諦說)을 제시하며 이를 비판하고 있다. 진제란 깨달음에 관한 진리로 구극의 진실의 말하며 속제는 세속사람의 아는 바 도리를 일컫는다. 즉 계율을 지키고, 남에게 베풀고, 사성제를 관찰하고, 삼보를 공경하라는 것이 속제적 교설이라면, 그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진제적 교설이다. 따라서 진제와 속제를 균등하게 실천해야 진정한 불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속제를 모르고 진제만 추구할 경우 가치판단이 상실되는 공견에 빠져 막행 막식하는 폐인이 되기 쉽고, 진제를 모르고 속제만 추구할 경우 기껏해야 하늘나라에 태어날 뿐 결코 해탈할 수 없다. 『중론』에서는 이러한 공견의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온갖 사견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공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공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 자가 있다면, 어떤 부처님께서도 그런 자를 구제하지 못 하신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