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봉축특집) 불교신문에 실린 허운,허주스님이야기

운영자 | 2007.05.27 00:00 | 조회 1688

[봉축특집] 사형사제 허운스님과 허주 스님

 

인연 소중하게 간직하고 함께 수행 정진

남방불교의 근본경전인 ‘앙굿타라 니카야(Anguttara Nikaya’에는 “현세의 좋은 사람을 다음생에서도 만나길 원한다면 동일한 믿음, 동일한 계, 동일한 보시, 동일한 지혜를 지녀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를 삶의 나침반으로 삼아 일념정진하며 살아간다면 맑고 향기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불제자의 삶을 택한 출가도반이나 ‘평생도반’으로 불리는 부부, 제일 가까운 혈육인 부모자식, 그리고 타국을 등지고 한국행을 택한 무수한 외국인들… 이들이 좋은 인연을 맺고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우리는 부처님같이’라는 테마로 소개한다.

 

속가서 불가까지 같은 길 걸어온

사형사제 허운스님과 허주 스님

동화사 주지 허운스님(사진 왼쪽)과 은적사 주지 허주스님은 속가형제이자 불가에서의 사형사제 간이다. 법인연으로 다져진 더욱 소중한 도반 사이다. 신재호 기자

 

 

 

“강원 대중 생활 승가상 확립에 중요”

아름다운 인연이란 말 없이 서로의 눈빛 만으로도 상대방의 생각을 알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다. 지난 3일 대구 동화사에서 만난 동화사 주지 허운스님과 은적사 주지 허주스님이 그런 관계다. 특히 이 두 스님은 사형 사제라는 법연 이전에 속가 친척이라는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 이기에 더욱 각별하다. 두 스님의 인연이야기를 살짝 들어봤다.

“스님, 오늘 왠지 피곤해 보이십니다.” “어제 지방에 좀 다녀와서 그런가 봐.” 허주스님이 허운스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 마디 한다. 40대 본사 주지라는 타이틀을 달고 주지에 부인한지 1년이 된 허운스님. “아직은 스스로도 평가를 내리기엔 시기상조”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오히려 “허주스님이 큰 살림 맡아 어찌 지내는지 염려된다”고 했다.

허운스님과 허주스님은 파계사 회주 성우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속가에서는 허운스님은 큰 집 형님이었고, 허주스님은 작은 집 동생으로 정확히 하면 육촌간이다. 어렸을 때부터 방학 때마다 자주 왕래가 있었다. 큰 할아버지는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시던 한학자였다. 어려서부터 허운스님은 한문을 배웠다. 그러나 늘 학교 공부로는 채워지지 않는 먹먹함이 있었다고 했다. 출가한 작은 할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허운스님은 차츰 밖으로 돌다 마침내 출가를 하게 됐다. 중학생 때 무작정 기차를 타고 내린 곳이 동대구였다.

“친형은 8살이 넘게 차이가 났는데 허운스님 하고는 2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자연스레 따르게 됐지요. 허운스님은 7남매 중 셋째 였는데 동생들을 잘 웃기고 편하게 해 주었지요. 그랬던 허운스님이 어느 날 출가를 해서 속가 집에 왔는데 어린 마음에 부러워했던 것이 불가에 귀의하게 된 동기 중 하나가 된 것 같아요.” 친척 형의 출가가 허주스님에게는 큰 영향을 미친 셈이다. 당시 고향인 안양에서 6명이 동진 출가해 지금도 모임을 갖고 만나곤 한단다.

어느 날 허운스님이 있는 통도사 강원에 허주스님이 출가하기 위해 찾아왔다. 허운스님은 “이 산문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남남이다. 그럴 자신 없으면 돌아가라”고 했다. 당시 15살 중학생이었던 허주스님의 출가를 부모님도 4번씩이나 찾아와 말렸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대학교를 나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때 출가하라는 것이 부모님의 뜻이었다. 허운스님과 부모님의 만류에도 스님은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 때부터 파란만장한 사춘기 스님의 통도사 강원시절이 펼쳐진다. 두 스님은 “하루가 여삼추 같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통도사에는 두 스님의 은사였던 성우스님과 각별했던 종범스님이 당시 강주로 계셨다. 당시 성우스님의 상좌 중에 5여명의 사형사제가 통도사 강원 생활을 시작했다. 1975년부터 3년간 한 방에서 지냈던 시절이었다.

“당시 강원에서 시험을 보면 대중 앞에서 ‘아무개 스님은 밥 값 하셔야 겠다’ 혹은 ‘밥 값 하셨군요’라고 성적을 말하곤 했는데, 당시 허운스님은 어렸지만 점잖은 데다가 염불소리도 좋고, 암기력이 좋아 조사어록의 난자를 하루에 100개, 50개씩 외곤 해 늘 칭찬을 들었어요.” 허주스님이 당시를 회고한다. 허운스님은 20대 때 벌써 통도사 범어사 강사를 역임했다.

당시 사춘기에 접어든 ‘개구쟁이 스님’들은 근처 동천계곡에서 목욕도 몰려다니면서 하고, 당시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신평에 나가 자장면을 사먹기도 했다. 자장면을 발우공양을 하고 그릇까지 깨끗이 씻어놓고 나왔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다.

그러다 허운스님과 허주스님이 잠시 헤어지게 된 계기가 생겼다. 1976년 졸업을 석달 앞두고 당시 강주였던 무비스님이 범어사로 가면서 대다수의 학인들이 범어사 강원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허주스님은 통도사 강원에 남아 졸업하게 됐고, 허운스님은 범어사 강원에서 졸업했다.

 

파계사 성우스님 은사로 잇따라 출가

지금껏 서로 격려하고 경책하며 정진

수행 환경 타종교 화합 등 관심 비슷

“종범스님은 항상 ‘경학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인지 동화사 주지소임을 보게되었을 때 전화드리니 스님께서 ‘축하드린다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저에겐 큰 경책이 됐지요.” 1977년 월정사 탄허스님 밑에서 화엄학림을 졸업하고, 통도사 범어사에서 중강의 소임을 산 것도 스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허운스님은 강원의 중요성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당시 학인들이 운력에 참여했었는데 지금 동화사에도 강원이 있지만 운력은 거의 줄어들어 아쉬워요. 전통강원이 소중한 것은 수행자로서 승가구성원으로서 전통적 승가가 갖고 있는 고유의 언어, 행동, 사유 등이 살아있기 때문이고,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하는 교육이기 때문이죠.” 허주스님도 동감했다. “‘훈습’이라는 것이 살아있는 곳이 강원이예요. 당시 5년의 힘으로 지금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을 정도이니까요.”

허운스님은 또 “강원생활을 ‘이력(履歷)’본다고 하듯 이것은 부처님 이력을 되밟아 본다는 의미예요. 옛날에는 강사만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대중 수 만큼 방석에 올라가서 대중법문을 시키곤 했던 것도 그런 이유”라고 강조했다. 허주스님이 봉은사에 재직해 있었던 기간을 제외하곤 두 스님은 늘 함께 가까이 지냈다. 특히 은적사 주지였던 허운스님이 허주스님과 함께 일할 당시 대구에 불교바람을 일으켰다. 천주교, 기독교계와 함께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치뤘던 것이나, 환경문제를 연계한 음반을 제작하고, 저출산 고령화 사회를 맞아 생명의 소중함과 사회적 책임감을 높이고 미혼모 시설을 돕기 위한 음악회를 성당과 함께 열기도 했다.

허주스님은 “앞으로 사찰 난방 등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는 사찰 환경 관련 세미나 등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타종교, 사회, 복지, 환경 등 두루 관심을 가진 허운스님을 그대로 빼닮았다.

임나정 기자 muse724@ibulgyo.com

 

 

허운스님은…

불교 ‘새바람’ 일으켜

1972년 파계사에서 일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뒤 범어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마치고 1977년 탄허스님 밑에서 화엄학림을 수료했다.

그뒤 범어사 통도사에서 승가대학 강사를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2002년 대구 은적사 주지를 맡아 대구지역에 새로운 불교바람을 일으켰다. 2005년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구 동화사 주지다.

 

허주스님은…

문서포교 남다른 원력

1974년 파계사에서 출가해 1978년 통도사 승가대학, 1981년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했다. 1997년 조계종 교육원 교육국장을 역임했고, 1988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 봉은사에서 포교국장, 교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당시 월간 〈봉은〉지를 창간하기도 한 스님은 문서포교에 남다른 원력을 세우고 현재 월간 ‘은적사보’, 월간 ‘동화’ 편집위원으로 있다. 현재 대구 은적사 주지를 맡고 있다.

 

[불교신문 2330호/ 5월26일자]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